프로야구, FA 몸값으로 재구성한 '포지션 베스트10'

[마이데일리 = 고동현 객원기자] 바야흐로 FA의 계절이다.

2007 프로야구는 막을 내렸지만 12월 1일부터 대만 타이중에서 열리는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아시아 예선과 더불어 김동주를 비롯한 FA 선수들의 거취가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FA 빅 3'로 불리던 조인성이 원소속팀인 LG와 계약한 가운데 김동주와 이호준의 종착지가 어디가 될 것인지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렇다면 역대 포지션별 FA 최고 몸값으로 재구성한 베스트 10은 어떻게 될까. 몸값 기준은 해당선수가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 최고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 박진만, 김한수, 박종호… 삼성이 독점한 내야

최근들어서는 주춤하지만 한 때 삼성은 FA의 큰 손으로 통했다. 과거 삼성이 계약했던 금액은 현재까지도 포지션별 FA 최고 몸값에서 많은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지명타자를 포함한 10개의 포지션 중 5개 포지션이 삼성이 행했던 FA 계약이다. 특히 내야는 삼성 선수들이 독식하다시피 했다.

2004시즌 종료 후 삼성은 당시 현대 소속이던 심정수와 박진만이라는 두 거물과의 계약에 성공했다. 삼성은 2004년 11월 23일 심정수, 박진만과의 계약을 동시에 발표하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삼성이 공격적으로 선수들을 영입하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그 해 한국시리즈 맞상대였던 팀에서, 그것도 가장 핵심적인 두 선수를 데려왔다는 점에서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몸값이었다. 심정수의 몸값은 4년간 최대 60억원. 2004시즌을 앞두고 롯데와 계약하며 정수근이 받았던 6년간 최대 40억 6천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였다. 비록 심정수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박진만의 몸값도 만만치 않았다. 박진만은 4년간 최대 39억원에 계약하며 거액을 챙겼다. 그 후 박진만은 2005년과 2006년 소속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일조하며 몸값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박진만 외에도 FA 최고 몸값으로 이뤄진 내야는 삼성의 독차지다. 삼성은 심정수, 박진만을 영입하기에 앞서 현대에서 박진만과 키스톤 콤비를 이뤘던 박종호를 2004시즌을 앞두고 FA로 영입했다. 박종호의 계약금액은 4년간 최대 22억원. 박종호는 삼성 이적 후 2년간 비교적 제 몫을 해냈다. 하지만 지난 해부터 부상과 부진이 겹쳐 2006시즌에는 104경기에 출장해 타율 .238 1홈런 30타점 22득점에 그쳤고 올시즌에는 단 17경기 출장에 타율 .185만을 기록했다.

3루수 역시 삼성의 차지였다. 삼성은 2004시즌 종료 후 심정수와 박진만을 영입하기에 앞서 소속팀 FA 선수였던 김한수를 잡는데 거액을 쏟아 부었다. 당시 김한수의 계약 조건은 4년간 최대 28억원. 야구계의 소리없이 강한 남자로 통하던 김한수였지만 FA 몸값만큼은 누구보다 화려했다. 김한수는 FA 계약 첫 해이던 2005시즌에 타율 .293 15홈런 73타점으로 선전했다.

하지만 박진만의 영입과 함께 2004년까지 유격수로 뛰던 조동찬이 3루수로 이동하자 포지션 연쇄 이동이 발생했고 김한수는 1루수로 포지션을 이동했다. 김한수의 FA 계약에는 3루수로의 활약이 크게 작용했지만 정작 FA 계약 첫 해 김한수의 포지션은 1루수가 됐다. 공수를 겸비한 3루수였던 김한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한편 김동주가 한국 프로야구에 잔류할 경우 김한수가 차지하고 있던 3루수 최고 몸값 주인공은 바뀔 전망이다. 이 밖에 지명타자 자리 역시 2002시즌을 앞두고 삼성과 4년간 최대 27억 2천만원에 계약한 양준혁이다.

내야 중 유일하게 다른 팀이 차지한 포지션은 1루수 자리다. 주인공은 장성호(KIA). 장성호는 2006시즌을 앞두고 원소속팀 KIA와 FA 계약을 마치며 4년간 최대 42억원이라는 거액을 이끌어냈다. 계약금 18억원, 연봉 총액 20억원 등 보장된 금액만 38억원이었다. 이는 2004시즌을 앞두고 삼성에서 KIA로 팀을 옮기며 마해영이 받았던 4년간 최대 28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였다.

▲ FA 시장의 은근한 큰 손 LG…투수와 포수 포지션 FA 최고 금액

삼성과 함께 FA 시장의 큰 손으로 군림했던 팀이 LG다. 삼성이 최근 들어 조용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반면 LG는 FA 시장이 생긴 이후 꾸준히 대형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홍현우로 시작한 FA 악몽은 아직까지 완전히 씻지 못했다.

LG는 2001시즌을 앞두고 해태 소속이던 홍현우를 4년간 최대 18억원에 계약했다. 최근 계약 액수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지만 당시로는 깜짝 놀랄만한 액수의 계약이었다. 하지만 홍현우는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가 친정팀 KIA로 복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했다. 이후 LG는 2004시즌을 앞두고 KIA 소속이던 진필중과 4년간 최대 30억원에 계약했지만 또다시 실패로 막을 내렸다.

2시즌간 숨을 고른 LG는 2007시즌을 앞두고 박명환을 거액에 영입해 또다시 화제를 일으켰다. 계약금 18억원과 연봉총액 20억원 등 보장액만 38억원. 옵션 2억원까지 포함하면 40억원에 이른다.

LG는 내년 시즌을 앞두고 소속팀 FA이던 포수 조인성과 지난 17일 계약했다. 3+1 계약으로 이뤄진 이번 계약은 조인성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최대 34억까지 받을 수 있다. 이는 FA 포수 중 역대 최고액이다. 기존은 2007시즌을 앞두고 진갑용이 원소속팀 삼성과 했던 3년간 최대 26억원. 이로써 LG는 투수와 포수 포지션 모두에서 FA 최고 몸값 선수들을 보유하게 됐다.

이 밖에 외야 FA 최고 몸값은 심정수 외에 정수근, 박재홍이 자리하고 있다. 2004시즌을 앞두고 롯데와 FA 계약한 정수근은 계약금 12억 6000만원과 연봉총액 19억원, 옵션 6억원, 4년 후 FA 포기 보상금 3억원 등 최대 40억 6천만원에 계약해 많은 화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정수근은 롯데 이적 후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2006시즌을 앞두고 원소속팀 SK와 계약한 박재홍은 최대 4년간 30억원이지만 2+2라는 독특한 조건의 계약을 했다. 박재홍은 계약금 5억원, 연봉 4억원, 옵션 1억원 등 첫 2년간 최대 15억원이었으며 조건을 충족시킬 경우 이후 2년간 동일한 계약내용을 갖는 FA 계약을 했다.

▲ FA 몸값으로 재구성한 포지션 베스트 10 (몸값 기준은 계약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때 받는 최대 금액)

투수: 박명환(두산→LG, 2007) 4년간 계약금 18억원, 연봉 5억원, 옵션 2억원 등 최대 40억원

포수: 조인성(LG 잔류, 2008) 3년 계약 후 조건 충족시 1년 추가 자동계약. 계약금 12억원, 연봉 4억원, 플러스 옵션 첫 3년간 2억원씩

1루수: 장성호(KIA 잔류, 2006) 계약금 18억원, 연봉 총액 20억원, 옵션 2억원 등 최대 42억원

2루수: 박종호(현대→삼성, 2004) 계약금 9억원, 연봉 2억 2천 5백만원, 플러스 옵션 4억원 등 최대 22억원

3루수: 김한수(삼성 잔류, 2005) 계약금 10억원, 연봉 4억원, 옵션 매해 5천만원 등 최대 28억원

유격수: 박진만(현대→삼성, 2005) 계약금 18억원, 연봉 총액 17억원, 플러스 옵션 매해 1억원, 마이너스 옵션 매해 1억 5천만원 등 최대 39억원

외야수: 심정수(현대→삼성, 2005) 계약금 20억원, 연봉 총액 30억원, 플러스 옵션 매해 2억 5천만원, 마이너스 옵션 매해 2억 5천만원 등 최대 60억원

외야수: 정수근(두산→롯데, 2004) 계약금 12억 6천만원, 연봉 19억원, 옵션 6억원, 4년 후 FA 포기 보상금 3억원 등 최대 40억 6천만원

외야수: 박재홍(SK 잔류, 2006) 계약금 5억원, 연봉 4억원, 옵션 1억원 등 첫 2년간 15억원, 조건 충족시 같은 계약내용으로 2년간 추가 계약. 총 30억원

지명타자: 양준혁(LG→삼성, 2002) 계약금 10억원, 연봉 3억 3천만원, 플러스 옵션 4억원, 마이너스 옵션 6억원 등 최대 27억 2천만원

[프로야구 역대 최고 FA계약을 가지고 있는 삼성 심정수. 사진=마이데일리 DB]

(고동현 객원기자 kodori@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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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설계자, 야구를 말하다

2007/09/13 15:52
프로야구 설계자, 야구를 말하다
스포츠2.0 | 기사입력 2007-09-13 10:41   기사원문보기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사무총장 이용일(사진 송기찬)

“대한야구협회 이름 바꿔라”

그래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거꾸로 얘기하자고. 지금 한국야구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해야 할 거냐는 말부터 먼저 하고 싶어. 이 늙은이는 1931년생이야. 그동안 아마추어야구, 프로야구에 관여해 왔고 지금도 외국 스포츠에 관한 걸 보고 듣고 있어.

내년 대학 졸업예정자가 246명이더군. 그런데 올해 지명된 대학 졸업예정자가 24명이야. 요새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이런 거 알려달라고 하면 늙은이가 주책없다고 할까 봐 신문 보도를 보고 안 거야. 뭐? 그래도 좀 늘어난 숫자라고? 고교 졸업예정자 545명을 더하면 800명쯤 되지? 이 가운데 대학이나 프로에 가지 못한 선수가 60%가 넘어. 쉽게 말해 1년에 500명씩 사회 낙오자가 나오는 거지. 이게 오늘날 한국야구가 침체된 가장 큰 문제야.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난 예전에 군산에 초등학교 팀을 4개 창단한 사람이야. 중학교, 고등학교 팀도 만들었지. 그래서 아마추어야구 사정을 좀 알아. 선수들은 30~40년 전부터 공부를 안 하고 야구만 했어. 요사이 바람직한 기사가 나오더구먼. 연세대인가 대학 감독이 선수들 공부를 시킨다고 하더라고. 어떤 중학교에서도 그런다고 하고. 오래전부터 그랬어야 했어. 군산에서 야구하던 애들 가운데 형편없는 실업자가 많아. 이 문제가 해결돼야 기존 팀도 발전할 수 있고 팀도 늘어날 수 있는 거야.

난 대한야구협회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한국학생야구연맹’으로. 지금 실업팀이 없잖아. 사실상 학생야구만 하는 거 아닌가. 진정 학생들을 위한 야구를 해야 돼. 학생야구를 어떻게 건전하게 육성시킬 건가 그리고 선수들을 사회 낙오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어떻게 활로를 개척해 줘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해야 해. 12월에 대만에서 야구 올림픽 예선전을 하지? 그러면 협회 회장 이하 부장들까지 다 가지. 돈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냐. 물론 이유는 있지. 그 대회는 아시아야구연맹이 관장하니 로비라도 할라치면 안면 있는 인사들이 가긴 가야 해. 하지만 그런 데 말고 과연 학생야구에 대한 관심은 얼마나 있는지 의심스러워.

학생 선수들, 공부하면서 운동하게 해야 해. 그러면 야구부에 학생들이 찾아 와. 군산상고 얘길 해 줄까? 예전엔 야구부에 40~50명이 있었어. 지금은 스무 명이 채 안 돼. 이른바 명문교라는 군산상고가 그래. 야구는 공부 다 한 다음에 하는 거야. 그리고 쓸데없는 기교 가르치지 말고 기본기를 가르쳐야 해.

우리나라에서 메이저리그로 많이 갔잖아? 다 천재 선수들이야. 하지만 제대로 뿌리 내린 선수가 몇 있나? 난 그 이유를 기초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으로 봐. 그런 다음에는 사회인야구를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해. 졸업생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거지. 지금 사회인야구는 하는 사람들끼리 알아서 운영해. 협회가 방치하지 말고 관장해야 해. 신문에 기사도 내고. 그러면 회사에서도 관심을 가질 것 아닌가. 돈을 그런 데 써야 하는 거야.

지금 KBO에서 야구부 창단하는 학교에 지원금 주고 그러잖아? 그럼 뭐 해. 지금 꼴로는 몇 년 만에 그 팀들 다 해산해. 야구하겠다는 학생이 없는데 어떡할 거야. 지금 있는 팀들부터 제대로 살려놔야지. 야구 어중간하게 해서 낙오자 되잖아. 10~20%면 말을 안 해. 60%가 넘어. 절반이 넘는단 말이야. '학생 야구'인데 '학생'은 없고 '야구'만 있어서 그런 거야.

경동중에서 육군 야구부까지

내가 어떻게 야구를 시작했냐고? 내 매부가 선린상업(현 선린인터넷고), 경성고상(뒷날의 서울대 상대)에서 야구를 한 유복룡이라는 분이야. 해방 뒤에는 국가대표 선수로 중견수에 1, 2번 타자를 했지. 박상규(전 대한야구협회 부회장) 선배보다 몇 년 위야. 어려서부터 매부에게 “용일아, 야구장가자”는 얘기 들으며 자랐어. 우리 집 바로 아래에 매부 집이 있었거든.

집에서 캐치볼도 하고 배트도 휘둘렀지. 경동중 2학년 때 해방이 됐는데 그때 매부 유복룡을 감독으로 모셔 지금의 경동고 야구부를 처음 만들었지. 1950년에 서울대 상대에 시험쳐서 합격해 상대 야구부에 들어갔어. 경남중에서 에이스로 이름을 날리던 장태영, 경남중 유격수 박정표, 대구상업의 김홍일, 인천공업에서 온 투수 김재복 등이 내 동기야. 지금은 다들 이 세상에 없군.

1950년 6월 23일에 학도체육대회란 게 열렸어. 중학, 고교, 대학 팀이 다 참가한 대회였어. 6월 24일 성균관대랑 붙었고 다음날 연세대와 경기가 열리게 돼 있었어. 그런데 전쟁이 터져 버린 거야. 부산에 가 있었는데 서울이 수복됐어. 그때 친구들이랑 “대학생이 조국통일전선에서 구경만 할 수 있느냐”며 의기투합했어. 그래서 육군에 특과장교로 입대했지. 근무 열심히 했어.

종전 뒤 대위 계급으로 5군단 공보장교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육군본부로 발령이 난 거야. 정훈감 김창정 장군이 부르더니 “우리 육군을 위해 야구 좀 하라”고 그러시더군. 사연이 있어. 육군은 순수하게 군인들로만 팀을 구성했지.

그런데 공군팀의 허곤 감독은 일반인 가운데 우수 선수들을 끌어 모은 거야. 정만오라고 좋은 투수도 그렇게 공군 팀에 들어갔지. 그러니 육군이랑 공군이랑 붙으면 사정이 어땠겠어. 수뇌부에서 “대 육군이 어떻게 일개 사단 병력도 되지 않는 공군에게 깨지냐”며 불호령이 떨어진 거야.

원래 육본은 대구에 있다 그 즈음 서울로 올라 왔어. 서울에 올라오니 졸병이 용산역에 마중을 나와 있더라고. 그 친구가 강태정(전 청보 감독)의 형이야. 그때 계급이 이등병이었나, 하사였나. 야구부랍시고 가 보니 한강 백사장에서 천막 쳐 놓고 합숙을 하고 있는 거야. ‘이거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를 찾아갔지. 돈암동에 큰 집이 있었는데 전쟁 때 인민군에게 징발돼 야전 병원이 됐지. 시체도 굴러다니고 해서 비워 둔 집이었어. 아버지께 부탁 드려 그 집을 육군 야구부 합숙소로 썼지.

김양중 스카우트 비화

이때쯤 양국진 참모차장이 굉장히 화가 나 있었어. 이 양반이 대단한 야구광이었거든. 무슨 수를 쓰든 육군 야구부를 강화하라는 거야. 간부 회의 끝에 “우리도 국가대표급을 스카우트하자” 그랬지. 박상규 선배에 1루수 김정환 등이 그래서 입대했어. 그걸로도 안 된다고 해서 고교 졸업 예정자던 김영복을 데려 왔지. 김영복은 나중에 농협 감독을 지냈는데 삼성에서 3루 보다 1루로 자리 옮긴 김한수의 아버지야. 송원그룹 회장 김영환도 고졸 선수로 입대했지.

1950년대 육군 야구부 더그아웃.(사진 제공=KBO)

그런데 스카우트 대상으로 점찍었던 한일은행 서동준이 해군에 가 버렸어. 서동준이라고 아나? 인천고 시절 명성을 날린 대단한 투수였지. 그러니 투수가 없는 거야.

김양중을 내가 스카우트한 얘기를 소개한 적 있다고? 원래는 육군 야구부 김일배 감독이 김양중을 데려올 뻔했어. 그때 김양중은 광주 농협에 근무하고 있었지. 그때는 금융조합(금련)이라고 했지. 김일배 감독이 김양중을 서울역까지는 데려왔는데 “농협 김영조 감독께 인사하고 오겠습니다”라는 말만 믿고 보내줬더니 소식이 없어.

난 이유를 알고 있었지. 공군 감독 허곤 과 금련 김영조 감독이 절친한 사이야. 허감독은 김감독에게 “절대 김양중을 다른 군에는 보내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놓고 있었지.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그 두 사람이 내 매형 유복룡과도 절친했거든. 매형 집에서 유숙한 적도 있었고. 나도 형님, 형님 불렀던 사이야.

하여튼 김일배 감독이 스카우트에 실패하자 다시 간부 회의가 열렸어. 그때 장태영이가 나서는 거야. “김감독 갖고 되겠소? 용일이를 보내야 하오.” 장태영은 나랑 두 사람 관계를 좀 알고 있었거든. 장태영은 김양중이 없으면 자기도 야구하기 힘들다고 강하게 말했지. 장태영이 경남중 졸업반 때인 1949년 청룡기 결승에서 광주서중의 김양중과 맞붙은 건 알고 있지? 그 대회에서 투수이자 4번 타자인 장태영은 김양중의 공에 꼼짝도 못 했어. 이른바 천적이었던 거지. 그 징크스는 나중에 실업야구 때도 이어지더군. 그러니 야구부장이 나더러 김양중을 스카우트해 오라더군.

난 조건을 하나 걸었지. 양국진 장군에게 광주지역 민사사령부 사령관 앞으로 ‘이 선수는 이용일 대위가 육군 야구단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각별히 협조하라’는 편지를 써 달라는 거였지. 민사사령부가 뭐 하는 데냐 하면, 병무 관계를 담당했던 곳이야. 그런데 민사사령관은 광복군이나 일본군 출신의 나이 든 대령들이 맡고 있었는데 이 양반들 소원이 별 달고 예편하는 거였거든. 그러니 현역 참모차장의 편지 한 장이면 껌뻑 죽을 거 아냐.

광주에 내려가서 헌병대를 찾아갔지. 헌병대 중대장이 나랑 헌병학교 교관 같이 했던 사이야. 중대장이랑 함께 헌병 지프를 타고 민사사령부를 찾아 사령관에게 편지를 꺼냈지. 미리 언질을 받은 사령관은 편지를 보더니 “이대위가 김양중, 이 병역기피자를 반드시 데려가야겠구먼”하는 거야. 그래서 “기피자라고 그러지 마세요. 제 친굽니다”고 했어. 김양중은 나와 고교야구를 같이 한 사이야. 사령관은 부하 중령을 불러 “금련에 가서 김양중이 잡아 와” 하고 호령을 했어.

얼마 되지 않아 김양중이 심양섭 씨와 함께 잡혀 왔어. 심양섭 씨는 김양중이 나온 광주서중 감독으로 그땐 금련에 함께 일했지. 얼마나 놀랐겠어. 하지만 날 보더니 안심하더군. 그래서 “육군이 부르니 다른 생각 마시오”라고 주의를 준 뒤 식사를 했어. 헌병 중대장과 나 김양중이 저녁 식사를 함께 했지. 중대장은 몸집도 크고 무서운 사람이었어. 나중에 CIA에도 몸담았고. 그 양반은 “민사사령관은 나보고 미행까지 하라는데 그렇게는 안 하겠소”라고 은근히 협박도 했지. 식사 뒤에 바로 기차 편으로 서울에 올라와 야구부 숙소로 갔어. 누가 가장 설치고 좋아하는고 하니 바로 장태영이야. 이게 ‘김양중 체포 스카우트 사건’의 전말이야.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와 최관수

육군에서는 소령으로 제대했지. 학교로 돌아와 경기 때만 선수로 뛰면서 학업을 마쳤어. 1957년쯤인가 아버님 사업을 맡아야 한다고 해서 군산으로 내려갔지. 경성고무 상무, 전무, 사장을 지냈어. 그런데 1년쯤 지나니 살이 엄청나게 찌더라고. 이거 안 되겠다 싶어 야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모았어. 몇 명은 되더라고. 같이 운동을 하면서 전북 대표로 전국체육대회에도 나갔지. 그러다 보니 욕심이 생겨. 이 참에 군산 야구를 키워보자는 생각이었지.

그래서 1959년인가 초등학교 팀 4개를 한꺼번에 만들었어. 그땐 국민학교라고 했지만. 그 다음엔 군산중학과 군산남중에 야구부를 세웠지.

군산중에는 그 전에 야구부가 있었는데 선수 7~8명이 자기들끼리 훈련하는 수준이었어. 사전 작업도 좀 했지. 초등학교 야구부 졸업생들은 무조건 군산중학과 군산남중이 받아주도록 교장들과 약속한 거야. 그 졸업생들 모아서 1968년 군산상고 야구부를 만들었지. 그러니까 초등학교 팀 4개, 중학 팀 2개, 고교 팀 1개인 피라미드가 완성된 거야.

그런데 군산 출신에게 야구 감독을 맡겨보니 도저히 안 되겠는 거야. 야구를 제대로 한 사람도 없었거든. 한 1년 반 만인가 대한야구협회 김정환 심판위원장에게서 전화가 왔어. 기업은행 에이스 최관수가 은퇴를 결심했는데 마산상고에서 영입하려 한다는 거야. 자기가 군산상고를 권유하니 그리로 가고 싶다고 했다더군. 마침 기업은행 행장을 내가 잘 알았어. 서울로 찾아가 지역 야구 발전을 위해 최관수를 달라고 했지. 대신 기업은행 군산지점의 실적을 올리는 데 노력하겠다고 했어. 며칠 뒤에 발령이 났지. 최관수가 부임한 뒤 1년 만에 군산상고는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했어. 그 다음해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해 ‘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을 얻었지.

그때만 하더라도 고교야구대회는 결승전이나 관중들이 찼어. 하지만 군산상고 우승 뒤에는 결승전이 아니어도 동대문야구장이 미어터졌지. 왜 그런지 아나? 동대문구장 근처에 살던 호남 사람들이 야구장으로 몰려온 거야. 그러자 전남일보의 김종태(전 광주일보 사장, 2006년 작고)가 쫓아와서 “전라남도에 고교 야구부를 만들고 싶다”고 하는 거야. 광주일고 야구부가 부활한 거나 진흥고, 동신고, 광주상고 야구부가 그렇게 태어났어.

좀 쑥스럽지만 호남 야구계에서는 전남의 김종태, 전북의 이용일 그랬지. 팀이 늘어나니 서울의 호남 사람들이 1회전부터 야구장을 찾았어. 그러다 보면 고향팀을 응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야구가 좋아 야구장을 찾게 됐지. 1970년대 고교야구 인기에는 호남 야구가 부활한 덕도 있어.

최관수 얘기는 가슴이 아파. 9년 동안 감독을 맡아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데 9년째인가 전남북 기업은행 지점 대항 축구대회란 게 열렸어. 친선 축구인데 좀 적당히 하지. 전력질주하다 그만 철봉에 부딪혀 쓰러진 거야. 나중에 후유증이 나타나더군. 감독 10년째 되던 해 병원에 가니 파킨슨병이라는 거야. 그래서 야구 감독을 그만뒀지.

대한야구협회 시절(1978~1980)

1981년 12월 11일 KBO 창립 총회. 왼쪽 끝이 이용일 회장.(사진 제공=KBO)

그렇게 군산 야구와 함께해 왔는데 고무신 사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어. 마침 선경(현 SK)에서 인수하겠다고 해 경영권을 넘겨주고 사장 이름만 달고 있었지. 1978년 초에 대한야구협회 김종락 회장과 최인철 부회장이 날 찾았어. 김종락 회장은 김종필씨 형이고 최인철씨는 프로 이후 대한야구협회를 이끈 사람이야.

만나보니 1978년 이탈리아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리는데 단장을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대회 앞에 네덜란드에서 한국, 일본, 쿠바를 초청해 할렘대회를 열었는데 그 대회도 참가했지. 그때 쿠바야구협회 회장인 나폴레온 씨를 만났어. 쿠바 아마추어스포츠가 왜 강한지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어. 나중에 프로야구 만들 때 큰 도움이 됐지.

대회가 끝나고 돌아왔는데 가을쯤에 다시 김회장과 최부회장이 만나자는 거야.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유치했는데 지금 조직으론 안 된다고 하더군. 그땐 실업연맹, 대학연맹, 고교연맹이 별도 기구로 따로따로 놀았어. 대회를 잘 치르기 위해서라도 협회 통합을 해야 하는데 내가 한가하니 일을 해 달라는 거야. 그래서 각 연맹 사람들 다 만났지.

일사천리였어. 실업의 장태영, 박현식, 김영조는 나와 절친한 사이이고 대학연맹 전무이사 김진영(전 삼미 감독,김경기 SK 코치 아버지)은 내 말이라면 껌뻑 죽었으니까. 고교 쪽에선 풍규명(전 MBC 청룡 이해창의 장인)을 만났고. 언론에서 딴죽 걸면 곤란하니까 기자들도 만나 설득했어.

큰 어려움은 없었어. 사실 공갈도 좀 했어. “박정희 대통령이 체육계 부정부패를 일소하라고 했다. 그래서 청와대에서 체육단체 가운데 가장 돈이 많이 모이는 야구를 ‘조질려고’ 마음먹고 있다”고 했지. 사실 아주 없는 소리는 아냐. 실제 그런 정보를 들었어. 나중에 전두환 대통령이 비슷한 일을 했으니. 연맹 사람들 만나기 시작한 게 가을이었는데 12월에 연맹 세 군데가 모두 해산 총회를 했어. 1979년 2월엔 지금의 통합 대한야구협회가 출범했지.

그 일을 끝낸 뒤 야구계에 발길을 끊었는데 다시 연락이 왔어. 나더러 전무이사를 하라는 거야. 통합은 해놓았는데 실무자가 없다는 거야. 부회장이라면 몰라도 전무이사는 곤란하다고 해서 거절했지. 그 한 달 뒤 김종락 씨가 다시 전화해 사무실에서 만나자는 거야. 서울은행 본점 건물에 김종락 씨 회사가 있었거든. 최인철 씨도 와 있었어. 자기 체면 좀 살려달라면서 강권하더군. 그래서 “알았습니다” 했더니 바로 야구협회로 가자는 거야. 가 보니 벌써 기자회견장이 차려져 있더군.

재임 기간이 1979~1980년인데 멋지게 했지. 사실 내 멋대로 했어. 지금까지 야구 행정가 가운데 나처럼 하고 싶은 일 보람 있게 한 사람은 적을 거야. 1979년 말에 여러 구상을 했어. 큰 게 두 가지야. 하나는 고가 장비였던 알루미늄 배트를 초•중•고교에 무상 공급하는 일이었어. 그땐 아마추어야구가 인기라 협회에 돈이 있었어.

두 번째가 야구인 외국 연수야. 그때 축구팀에선 유능한 선수 출신을 유럽으로 연수를 보냈거든. 그럼 우리 야구는 협회 차원에서 야구 발상지인 미국에 연수를 보내자는 생각이었지. 워싱턴에서 협회 국제교류 문제를 맡고 있던 이덕준에게 물어보니 문제 없대. 그래서 1980년 예산에 두 건을 집어 넣었어.

하나 더 했지. 1979년 10월에 예산에도 들어 있지 없던 야구대제전을 치렀어. 협회 통합 기념으로 고교, 대학, 실업 선수들이 출신 고교 유니폼을 입고 겨루는 대회지. 김종락 회장이 “무슨 예산으로 하느냐”고 묻길래 “별도 예산 잡아 하겠다. 걱정 마시라”고 했어. 감독자 회의에서 출전교에는 모자부터 스파이크까지 야구 장비 일체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언론 관계자들도 만나 협조를 부탁했지. 쉽게 말해 큼직하게 써달라고 한 거야. 첫날부터 만원이었어.

여기 편집위원인 신명철이는 그 대회에 기자로 처음 취재 나왔다고 했지. 그 대회 경험도 뒷날 프로야구 만드는 데 도움이 됐어. 대회 도중에 박대통령이 죽어 대회가 일시 중단되긴 했지만 결승전까지 모두 치렀어. 하지만 야구대제전은 1회가 마지막이었어. 이듬해 나도 협회를 떠났고.

미국 연수 얘기만 좀 더 하지. 협회 사업으로 미국 연수를 떠난 이가 지금 삼성구단 사장인 김응용이야. 1979년 말에 김응용이가 날 만나자는 거야. “저, 그 얘기 들었습니다. 저 좀 보내주세요” 그러더군. 김응용은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 때 함께 갔지. 그때 한 달 동안 같이 생활해서 인간성을 잘 알지. 그때 선수단 가운데 여럿이 선수단 비용을 어떻게든 쇼핑 등 개인 용도로 쓰려고 했지.

하지만 김응용은 전혀 그러지 않았어. 쓰고 남은 경비는 돌려줬을 정도였어. ‘야구인 중에 응용이밖에 없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니까. 그래서 “좋다. 1980년에는 너를 보낸다”고 승낙했어. 그런데 문제가 생긴 거야. 1980년 도쿄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리게 돼 있었어. 협회에서는 감독 후보로 박영길과 한을룡을 점찍고 있었지. 김응용은 연수 보내야 하니까 열외였고.

1979년 캐나다에서 친선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감독이 박영길이야. 김종락 회장이 미국 출장 길에 캐나다에 들러 대회를 지켜봤다고. 그런데 미국전인가 캐나다전인가에서 8-0으로 앞서던 경기를 9회말에 9점을 내줘 망쳐버린 거야. 김회장이 그 꼴을 봤으니 어쩌겠어. 박영길은 탈락이었지. 역시 김응용이 맡아야겠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렀어. 그래서 1980년 초에 응용이를 불러다가 “1년만 연기하자, 대신 다른 사람은 그 전에 안 보내겠다”고 했지.

그래서 김응용이 1981년에 미국 연수를 떠난 거야. 그런데 1982년 여름에 협회에서 더 이상 지원을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다더군. 그때면 내가 프로야구 사무총장하던 때야. 마침 그때 해태 감독이 공석이었어. 김동엽 감독이 여러 문제를 일으켜 물러나고 조창수가 감독 대행을 맡고 있었지. 박건배 구단주에게 “김응용이면 몇 년 안에 우승할 수 있다”고 추천했지. 김응용이 귀국하고 며칠 뒤 박구단주와 만났는데 응용이 이 친구가 그 자리에서 감독 제의를 오케이해 버렸지. 난 내심 좀 ‘튕겼으면’ 했지. 김응용이 해태 감독이 된 사연은 그래.

프로야구 창설

이제 프로야구 이야기를 해야겠군. 전두환이 집권한 다음에 숙정 바람이 불었어. 그래서 집에서 쉬고 있는데 서울상대 동기인 이호헌(전 KBO 사무차장)에게서 연락이 왔어. 김동엽이 “문화방송(MBC)에서 프로야구단을 만들 생각이니 도와달라”고 했다더군. MBC 이진희 사장이 창사 20주년 기념 사업으로 독립기념관건립과 프로야구단 창단을 계획하고 있었거든. 김동엽은 MBC 기획실에 있는 후배에게 부탁 받은 거였고. 하지만 리그는 아니고 축구의 할렐루야처럼 한 팀만 만들겠다는 거였지.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 개막전.(사진 제공=KBO)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두 달 뒤 이호헌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어. 이호헌의 마산고 동기동창에 우병규라는 이가 있어. 우병규는 전두환과 국방대학원 동기였는데 그때부터 친했다고 하더군. 전두환 정권이 열리니 정무수석이 됐어. 우병규가 이호헌에게 연락해 “이상주 교육문화 수석 좀 도와 달라”고 했대. 대통령이 프로스포츠를 만들라는데 그 계획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거야.

이상주 수석이 축구협회, 야구협회에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했어. 그런데 야구에선 돈이 많이 든다. 그리고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를 끝낸 뒤 추진해 달라고 했고 축구에선 450억 원을 들여 축구장을 지어달라고 했다는 거야. 그때 450억 원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었어. 보고를 받은 전두환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역정을 내 비서관들이 기합을 받을 꼴이었어. 그런데 프로야구를 1982년에 당장 시작하려는 게 당시 청와대의 생각이었어.

그래서 ‘한국프로야구 창설계획서’라는 18페이지짜리 문건을 내가 만들었지. 작성에 20일 걸렸어. 9개년 계획이었는데 각 3년씩을 성장기, 발전기, 안정기로 나눴지. 문건을 만들어 신라호텔에서 이상주를 만나 계획서를 줬어. 이 보고서를 갖고 당시 실세라던 비서관 네 명이 회의를 했어. ‘3허’라던 허문도, 허삼수, 허화평과 이학봉이었지. 결론은 이 계획서로는 안 된다는 거였어. 가뜩이나 지역 감정이 심한데 프로야구가 지역 감정을 더 나쁘게 할 수 있다는 말이었지. 내 계획서에는 프로야구는 철저한 지역 연고를 바탕으로 하게 돼 있었거든.

이상주가 회의 결과를 들려주면서 난색을 나타냈지. 그래서 설득했어. 1978년 네덜란드에서 만난 쿠바야구협회 나폴레온 회장 얘기를 했지. 나폴레온 회장은 쿠바야구가 발전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어. 쿠바에선 초등학교부터 국가대표가 될 때까지 출신 지역에서만 야구를 하게 돼 있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사라도 가면 국가대표로 발탁이 안 돼. 자기가 야구를 배운 곳에서 계속 야구를 하니까 선수는 자기 고향에서 영웅이 되는 거야. 영웅을 보기 위해 야구장은 꽉꽉 차고. 나도 원래는 선수를 출신지로 분류해 연고 구단에 배정할 생각이었지.

그런데 답이 안 나오는 거야. 그 많은 선수들 출신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더라고. 그래서 출신 고교를 기준으로 한 거야.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했어. 세계에서 남미 사람들이 가장 다혈질이다. 축구장에서 총기 사건도 일어나고 난동도 벌어진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축구 관중들이 축구장 밖에서 소요를 일으킨 적은 없다. 그러니까 야구장에서 관중들이 난동을 일으키더라도 그 사람들이 야구장 밖에서 데모를 하진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애향심이 강해지면 결과적으로 나라 사랑과 이어지지 않느냐고 설득했지. 다음에 이상주를 만났더니 “계획서대로 추진하라. (창설 과정에서 필요하다면)청와대를 마음대로 팔아도 좋다”고 오케이 사인을 주더군. 뭐, 난 많이 팔진 않았어.

계획서 얘기를 좀 더 할게. 전국을 6개 지역으로 나눠 연고 기업에 맡긴 다음 연고지 고교 출신 선수들을 뽑는다는 구상이었지. KBO와 대한야구협회에서 펴낸 <한국야구사 >에는 부산이 롯데, 서울이 MBC로 돼 있어.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지. 그런데 2003년인가 <중앙일보> 이태일 기자 부탁으로 예전 일을 회고담 형식으로 연재한 적 있어. 그때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 보고서를 찾았는데 서울이 롯데, 부산이 럭키로 돼 있더군. 그러니까 지금 롯데와 LG의 연고지가 거꾸로였던 셈이지. 호남 지역 원래 후보가 삼양사였다는 건 좀 알려져 있지.

여기에는 다른 비화가 있어. 삼양사가 어렵다며 사주들이 친척지간인 <동아일보>에 호남을 맡길 생각이었지. 일본도 요미우리신문은 물론이고 예전 일이긴 하지만 <아사히신문>도 프로야구를 운영한 적이 있어. 내 계획서에는 <중앙일보>도 창단 후보 회사였어. 삼양사 김상홍 사장은 동생들이랑 논의하다 “아무리 전두환이가 시키는 거라지만 우리가 무슨 스포츠를 아냐”며 포기했지. 그래서 <동아일보>에 계획서를 줬는데 거기에서도 거절이야. 그런데 계획서가 신문사 편집국에 도는 바람에 <동아일보>에서 프로야구 출범 특종 기사를 쓴 거야.

KBO에 대한 고언

옛날 얘기가 길었군. 아마추어야구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프로야구 이야기로 끝을 맺지. 난 우리 프로야구가 하느님처럼 생각하고 연구해야 할 사람이 둘 있다고 봐. 한 명은 프로미식축구 NFL의 피트 로젤 전 커미셔너야. 이 양반의 철학은 이거야. 모기업이 돈이 많든 적든 리그에 소속된 모든 구단이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구단의 재원은 균등해야 한다는 거지.

그 양반은 1961년에 취임해 28년 동안 이 체제를 만들었어. 그 결과 NFL에는 적자나는 구단이 없어. 수퍼볼 중계권료가 1961년에 얼마였는지 아나? 61만 달러인가 그랬어. 지금은 수백 배 넘게 뛰어 올랐지. 그 돈을 다 균등 분배해. 지금도 NFL에선 우승팀 예상이 안 돼. 스카우트와 운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어느 팀이든 우승할 수 있어.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려면 다 망하는 거야.

두 번째 사람은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첼시구단의 피터 캐년 사장이야. 스포츠용품업체 업브로 사장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단장을 거쳐 2004년에 첼시 사장으로 부임했지. 유럽 스포츠는 미국과 달리 스폰서 수입이 막대해. 그런데 2004년에 첼시 스폰서료가 300만 파운드(약 57억원)인가 그랬어. 그걸 2005년에 5천만 파운드로 만든 거야. 이 양반이 뭘 한 줄 알아? 첼시 감독으로 최고의 인재를 데려온 거야. 그리고 감독에게 “내년 선수 예산이 얼마다”고 알려줘. 그럼 감독은 예산 범위에서 선수 영입 계획을 세워. 사장은 그 내용대로 유럽 전역을 돌려 스카우트를 해 오는 거야.

이런 건 미국 메이저리그도 못 따라 가. 그렇게 하니 두 시즌 연속 우승을 했어.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고 스폰서료도 덩달아 올라갔지. 그래서 삼성전자가 첼시에 1년에 190억 원씩 내는 거 아냐. 그 돈 내는 쪽도 만족이야. 효과가 크거든.

지금 KBO 총재나 총장이 이런 데 관심이나 있을까. 무슨 위원회니 자리만 잔뜩 만들어 놨어. 나도 프로야구 출범을 준비할 때 “전직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총재가 되면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어.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냐.

정치인 총재? 구단주 총재?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한국프로야구 발전해야 해. 나이, 젊어도 좋아. 40대, 50대라도 프로야구에 애정과 열정이 있고 매니지먼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해. 그래서 한국적인 프로야구 발전 계획을 만들어야 돼. 열심히 연구하면 나오게 돼 있어. 내가 젊으면 하겠는데 늙어서 안 되겠어. 지금도 한참 떠드니까 멍해.

1990년 11월 30일 한일 슈퍼게임 조인식. 오른쪽 끝이 이용일 전 총장.(사진 제공=KBO)

KBO는 기구를 대폭 축소해야 해. 조직이 너무 커. KBO에 왜 홍보팀이 필요하지? 프로야구 홍보는 구단에서 하는 거야. KBO는 조직만 축소하면 예산 3분의 2가 줄어. 그 돈을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써야지. 초창기 KBO 예산이 4억~5억 원이었어. 그런 시절에도 6천만 원짜리 컴퓨터를 들여 놓고 기록 관리를 했어.

지금 예산이 100억 원이 넘어. 프로야구가 살 방법은 지금도 많아.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쓸데없는 데 들어가는 돈이 많더군. 그 돈이 어떤 돈이야. 삼복더위에 선수들이 땀에 절어가며 번 돈 아닌가. 다 선수들이 번 돈이지. 중계권료니 스폰서료니.

사실 프로야구가 사는 길은 간단해. 잉글랜드 프로축구가 어떻게 발전했나? 1980년대에 축구장에서 사고가 일어나 몇십 명이 죽었어. 이래서 안 되겠다 싶어 축구장을 좌석제로 바꾸고 환경을 개선했어. 새 구장도 만들고. 이러니 새로운 팬층이 나타났어. 어린이들과 가족 단위 관객이 확 늘었어. 환경이 좋아졌으니까. 이게 기본이야. 구단의 수입이 느니까 비싼 선수들을 데려올 수 있고 경기 수준이 높아져. 그러면 브랜드 가치가 높아져서 중계권료와 스폰서료가 올라가지.

기본적으로 환경이야. 프로야구 출범할 때 서종철 총재와 내가 시장들 찾아다니면서 구장에 대해 논의를 했어. 그땐 조명시설이 없는 구장도 많았거든. 그런데 그때랑 지금이랑 달라진 게 뭐야. 지금 구장은 우리 국민들이 판잣집 살 때 구장이야. 이제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면서 매일 목욕하고 있단 말이야. 이 사람들이 판잣집 살 때 야구장에 가족을 데려가려 하겠어?

잠실야구장을 어떻게 만든 줄 아나? 1978년에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유치했는데 3만 명이 들어올 수 있는 야구장이 필요했어. 서울시장 만나서 구장 지어달라고 하니 그저 듣기만 해. 그래서 김종락 회장이 다시 시장을 찾아가서 1억 원을 내놨어. “야구인들이 야구장 건립을 위해 모금한 돈이니 구장 건설에 보태주십시오”라고 했지. 사실은 협회 예산이었지만.

그래서 잠실구장이 생겨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도 열고 프로야구에서도 쓰고 있는 거야. 김종락 씨 얼굴도 얼굴이었지만 그때 1억 원 안 내놨으면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이나 돼서야 잠실구장이 생겼을 거야. 지금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구장이 대구, 광주, 대전 구장 아닌가. 이 세 구장에서 해마다 10억 원씩만 내놔 봐. 그게 언론에 크게 보도될 거 아냐. 그럼 시에서 새 구장을 안 만들 수 없어. 여론 때문에. 지금 KBO가 쌓아두고 있는 돈이 백몇십억 원이야. 그거 놔 두고 뭐해. 쓸데없는 데나 쓰고 있고.

“돔구장은 감당도 안 돼”

돔구장? 일본프로야구 얘기를 좀 해 줄게. 긴데쓰 버팔로스는 센트럴리그와 퍼시픽리그가 출범한 1950년 창단했어. 이 팀이 2004년 시즌을 마치고 없어졌어. 명목은 오릭스와 합병이었지만 실은 돈 한 푼 안 받고 선수들 죄다 넘겨준 거야. 그때 사장이 야마다라는 사람이었는데 주주총회를 하려니 걱정되는 거야. 50년 넘게 버팔로스 팬이었던 주주들이 가만 있겠냐는 거지. 웬걸. 총회에서 주주들이 기립 박수로 용단을 내린 사장을 환영했어. 반대 의견은 하나도 없었고. 1년 적자가 30억 엔이 넘는 야구단을 운영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긴데쓰는 일본 사철 가운데 철도 연장이 가장 긴 큰 회사야. 그런 회사도 그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안 그런가. 도쿄돔 3층 관중석이 비고 니혼 TV 시청률이 떨어지니 와타나베 쓰네오 오너가 비싼 선수들 다 내보내라고 한 거야. 사실 이승엽이한테 4년 30억 엔 준 건 특별한 거야. 근데 승엽이가 보답을 못해. 일본프로야구도 위기야.

그런데 긴데쓰의 적자가 어디에서 나온 줄 알아? 3분의 1 가량인 10억 엔이 오사카돔 사용료야. 손정의가 인수한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미국 투자회사에 연간 40억 엔 내고 후쿠오카 야후돔을 빌려 쓰고 있어. 이것저것 수입 따져보면 실제 사용료는 10억 엔 정도라더군. 예전에 요미우리가 다카하시 요시노부와 계약할 때 ‘언더 테이블 머니’로 20억 엔을 냈다는 게 정설이야. 세이부 라이온스는 마쓰자카 다이스케에게 30억 엔 줬다더군.

그런 일본 구단들이 지금 10억 엔을 아까워하고 있어. 지금 오사카돔에선 일년에 몇 번만 프로야구 경기가 열려. 긴데쓰와 합병한 오릭스나 인기 구단이라는 한신 타이거스가 10억 엔 때문에 오사카돔을 못 쓰는 거야.

그런데 한국에 돔구장이 생긴다면 어떨까. 돔구장 건설에 4천 억~5천 억 원이 들어.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감당할 수 없어. 그러니 민간 자본 유치하겠지. 민간 회사에서 50년을 갖고 있더라도 투자금 회수하려면 연간 100억 원씩 사용료를 받아야 돼. 두 구단이 돔구장을 쓰더라도 50억 원인데 그 돈 감당할 프로야구 구단이 있어? 난 돔구장을 추진한다는 얘기 듣고 속으로 ‘웃기지 마라’ 그랬어. 구단들이 여론에 밀려 돔구장 들어가더라도 1년도 못 돼 예전 구장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거야.

왜 돔구장을 만들어. 훨씬 적은 돈으로 3만 명 정도 규모 구장을 만들거나 구장 환경을 개선할 수 있어. 그러면 관중이 오게 돼 있어. 그럼 중계권료와 스폰서료가 올라가 구단이 빨리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수 있는 거지.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돼.

이 용 일

1931년 4월 17일 서울 출생

경동중-서울대학교 상대

1945년 경동중 야구부 창설

1950년대 군산지역 초등학교, 중학교, 고교에 야구부 창설

1979~1980년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

1981년 프로야구 창설 작업

1981~1991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

1992~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

SPORTS2.0 제 67호(발행일 09월 03일) 기사

신명철 편집위원,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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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약 조짐' KIA-롯데의 차가운 여름

2007/06/30 12:42
'2약 조짐' KIA-롯데의 차가운 여름
데일리안 | 기사입력 2007-06-30 09:35 | 최종수정 2007-06-30 10:02    기사원문보기
KIA·롯데, 2약으로 굳어질 조짐
지친 팬들, 집중적인 비난 성토


[데일리안 이상학 객원기자]29일 광주구장과 사직구장은 마치 다른 그림 찾기라도 해야 할 것처럼 비슷한 풍경을 연출했다.

원정팀은 홈팀을 무차별 폭격했고, 홈팀은 일찌감치 백기를 들었다. 홈팀의 무기력함을 멍하니 지켜보던 홈팬들과 경기장 분위기도 얼어버렸다.

이날 광주구장의 KIA는 LG에 3-9, 사직구장의 롯데는 삼성에 1-10으로 무기력하게 대패했다.

홈팀의 무기력함을 대변이라도 하듯 광주·사직구장에는 의미심장한 현수막들이 걸려 눈길을 끌었다. 광주구장에는 구장 신축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사직구장에는 코칭스태프의 선수기용과 구단 프런트의 행정을 비방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이처럼 KIA와 롯데의 팀 분위기는 뜨거운 여름에 어울리지 않게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 ⓒ KIA 타이거즈


▲ 2약으로 굳어지나

올 시즌 프로야구도 어느덧 개막한 지 약 3개월이 흘렀다. 이달 초까지만 하더라도 유례없는 순위다툼으로 안개정국이었지만, 이제는 서서히 순위 구도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KIA와 롯데는 순위다툼에서 낙오해 2약으로 굳어질 분위기다. 26승1무42패를 마크하고 있는 KIA는 6월 초부터 최하위를 도맡았다. 롯데도 6월 중순을 기점으로 힘이 부쩍 떨어졌다. 29승2무36패로 7위. 8위 KIA에 4.5경기나 앞서있지만, 6위 현대(32승34패)와도 2.5경기로 승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KIA는 최근 10경기에서도 2승8패로 8개 구단 중 가장 좋지 않은 페이스를 보이고 있으며 롯데 역시 최근 20경기에서 7승13패로 완연한 하락세다.

기록에서도 KIA와 롯데는 2약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타격. 올 시즌 KIA와 롯데는 잔루 1·2위를 다투고 있다. 30일 현재, KIA가 1위(541개), 롯데가 2위(538개)다. 잔루가 많은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만큼 많은 득점 찬스를 만들었기 때문.

그러나 KIA와 롯데는 팀 득점에서 각각 7위(248점)·6위(270점)에 그치고 있다. 찬스를 많이 만들고도 제대로 살리지 못한 탓이다. 득점권 타율 최하위(0.214) KIA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고 롯데는 득점권 타율 4위(0.274)에 올라있지만, 주자를 확 쓸어 담을 장타력이 부족한 데다 타선이 터질 때 한꺼번에 터진 경우가 많아 효율성이 떨어졌다.

그러나 KIA와 롯데보다 타격이 더 안 좋은 팀도 있다. 바로 삼성이다. 삼성은 올 시즌 주요 타격 전 부문에서 중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하지만 아직 순위다툼에서 낙오하지 않고 최근 조금씩 상승세를 타고 있다. 타격이 약하지만 마운드가 굳건하며 투타의 엇박자가 상대적으로 덜했다.

KIA와 롯데는 마운드가 삼성처럼 강력하지 못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투타의 엇박자다. 마운드가 안정되면 타선가 말썽이고, 타선이 터지면 마운드가 무너지길 반복했다. 약팀의 전형적인 모습이 바로 투타의 엇박자다.


▲ 비난 레퍼토리

◇ ⓒ KIA 타이거즈

KIA와 롯데는 전국적인 인기구단이다. KIA는 최근 들어 광주의 야구열기가 예전에 비해 사그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국시리즈 9회 우승의 신화가 살아있는 곳이다. 더욱이 수도권에서 대규모 팬들을 끌어 모으는 관중 동원력을 지녔다. 롯데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롯데의 성공이 곧 프로야구의 흥행 성공이었으니 말 다한 셈.

그러나 KIA와 롯데 같은 전국구 인기구단은 기대만큼 성적을 내지 못할 때 팬들의 집중적인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쏟아지는 비에 부랴부랴 우산을 써도 옷이 흠뻑 젖을 만큼 비난의 강도가 세기 때문이다. 온·오프라인에서의 성토는 예삿일이며 경기장에서 원색적인 현수막을 내걸어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팬들은 일차적으로 선수들을 비난한다. 그라운드에서 보여 지는 것은 선수들의 플레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타깃이 바로 감독이다. KIA 서정환 감독과 롯데 강병철 감독은 올해 가장 많은 원성과 성토를 사고 있는 감독들이다.

특히 29일 사직구장에서는 강병철 감독의 선수기용을 놓고 팬들이 원색적인 항의 문구를 담은 현수막을 내걸어 구단 관계자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감독의 선수기용과 작전 하나하나가 팬들 사이에서 도마 위에 오르는 것.

잘할 때는 모든 것이 좋고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못할 때는 모든 것이 엉망인 것처럼 보인다. 지금 현재로서는 서 감독과 강 감독이 무엇을 하더라도 비난을 면키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리고 이제 팬들은 구단에게까지 타깃의 비난의 범위를 늘렸다. 광주구장에 걸린 구장과 관련한 현수막은 구단을 넘어 광주광역시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광주구장은 7개 구장 유일하게 매트형 인조잔디를 쓰고 있다. 마치 콘크리트 바닥처럼 딱딱하다. 올해 KIA에 부상선수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나 불운이 아닐지도 모른다.

롯데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29일 팬들의 항의 현수막에 적힌 구단 프런트에 대한 비판문구는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예부터 롯데는 투자에 인색하고, 운영방식에 있어 지탄을 받아왔다.


▲ 우연은 없다

◇ ⓒ 롯데 자이언츠

‘888857’ 비밀번호가 아니다. 롯데의 지난 6년간 팀 성적이다. 롯데만큼은 아니지만 KIA도 최근 몇 년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2~2004년, 3년 연속 포스트시즌에서 밀린 KIA는 2005년엔 창단 이래 처음으로 최하위 수모를 당했다. 지난해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올해 최하위로 처지고 말았다.

다행히 아직 시즌은 절반가량 남아있다. 비록 지금은 순위권에서 처졌지만 반전의 여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대반전을 기대하는 것은 차라리 요행에 가깝다.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를 뜯어고치지 못한 상황에서 대반전을 이룬다면 문제는 원점이 되어버린다.

KIA는 구장 문제부터 확실하게 해야 한다. 딱딱한 인조잔디는 선수들의 적극성을 결여시키는 것은 물론, 선수들을 부상의 늪으로 밀어뜨리고 있다. KIA 선수들의 플레이가 근성 없어 보이는 것은 분명 인조잔디가 한 몫하고 있다. 롯데 역시 그간의 잘못된 관행과 방식을 뿌리째 뽑고 개선할 필요가 없지 않다. 선수와 감독의 탓으로만 돌리기엔 이처럼 오래 하위권에 머물 수 없다.

의외성이 많은 스포츠가 야구지만, 적어도 한국프로야구는 의외성이 많이 줄었다. 삼성은 한국시리즈 2연패를 차지했고, 현대와 두산은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도 어떻게든 성적을 내고 있다.

하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삼성은 효율적인 투자의 효과를 뽑았고, 현대와 두산은 오랜 시간 축적된 전통의 힘이 발휘되고 있다. 지난해 6위였던 SK가 올해 줄곧 단독선두를 달리며 성적과 인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것도 전면적인 구단 개편과 변화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지난해 최하위 LG도 SK와 마찬가지 과정을 걷고 있다.

전통이 흐지부지해졌고, 이렇다 할 투자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KIA와 롯데는 가장 변화가 절실한 팀들이다. 언제까지 팬들에게 기다림만을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다. 프로야구단도 자선단체가 아니지만 그들을 응원하는 팬들도 결코 자원봉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 '초시계는 반환점을 돌았다' 롯데
리오스<상>

데일리안 스포츠/ 이상학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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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스포츠 편집 김태훈 기자 [ktwsc28@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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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 마산은 겁나던걸..-_-;;

그리고 광주에서 10-9로 진 그날도, 롯데 응원하던 여성분 한 분이,
마지막에 역전당할 때, 다른 관중 한 분과 싸우던 장면이 중계화면에 잠깐 잡혔었는데,
참..그러고보니, 4:0에서 4:7로 역전하니까 물병 날아오더라..-.-;;

암튼..아직도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아저씨들..술 적당히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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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과 달라진 프로야구 관중풍경
[한겨레 2007-05-24 18:39]    

[한겨레]
1986년 10월22일 밤 9시45분 대구구장 앞.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삼성이 해태에게 5-6 역전패를 당하자, 삼성 팬 2천여명이 “타도 해태”를 외쳤다. 급기야 흥분한 몇몇 관중들은 45인승 해태 선수단 버스에 불을 질렀다. 1차전 광주 경기에서 삼성 투수 진동한이 술 취한 관중에게 소주병으로 머리를 맞은 데 대한 ‘보복’이었다.

버스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관중들은 경찰이 최루탄을 쏘고서야 해산했다. 당시 난동이 어찌나 살벌했는지, 지금도 야구계에선 ‘대구 폭동’으로 불린다.

1990년 8월26일 잠실구장에선 LG-해태 경기 도중 관중 500여명이 그라운드로 난입했다. 승부가 LG쪽으로 기울어지자 흥분한 3루쪽 해태 팬들이 먼저 경기장으로 내려왔고, 이에 맞선 LG 팬들과 충돌했다. 관중 10여명이 다쳤고, 경찰은 19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2007년 5월 19, 20일. 주말을 맞아 잠실 등 전국 4개 구장에는 이틀간 17만명이 몰려들었다. 사직구장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지만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특히 롯데는 주말 3연전을 모두 졌는데도 이틀 연속 사직구장은 만원을 이뤘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진형 홍보팀장은 “과거 야구장 관중들은 승패에 집착하는 경향이 심한 반면, 요사이는 즐기러 오는 분들이 대부분”이라고 진단했다. 이승재(41·의사·경기 수원시)씨는 “메이저리그나 일본프로야구를 즐기게 되면서 관중문화도 성숙해진 듯하다”고 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관중 난동사건은 시즌마다 심심찮게 일어났다. 깡통이나 오물 투척은 예사. 김현준(36·회사원)씨는 “학창시절 야구장에 간다면 부모님이 ‘깡통이나 병 맞는다’며 말렸다”면서 “부산이나 광주로 원정 응원을 가면 홈팬들에게 맞을까 봐 숨죽이고 경기를 봐야 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최근엔 가족들이 함께 나들이삼아 찾을 정도로 야구장 풍경이 크게 바뀌었다. 특히 관중 드세기로 유명한 부산 사직구장과 마산구장의 변화가 눈에 띈다. 서정근 롯데 홍보팀장은 “주 관중이 과거 30~40대 아저씨들에서 요즘엔 10대 후반~20대 연인과 젊은 부부로 바뀌었다. 특히 여성관중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야구장에 가족석이 등장한 것은 이런 변화의 한 단면이다. 2002년 인천 문학구장과 지난해 사직구장에 ‘스카이박스’(가족 및 단체석)가 생겼고, 잠실구장엔 올해 1루와 3루측 관중석에 테이블이 놓인 가족석이 만들어졌다. 김정균 두산 마케팅 팀장은 “올해 만든 가족석이 50석으로, 좌석당 1만5천원인데 거의 매 경기 매진된다”고 말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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