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이게 누구여. 잘 지냈어요.” 정영기 롯데 2군 감독이 휴대전화를 들며 환하게 웃었다. 평소 친분이 있는 모 프런트 팀장이 전화를 건 참이었다.
“아, 네….” 그러나 상대의 대답은 영 밝지가 않았다. “저, 감독님 지금 어디십니까.”
정 감독은 이날 2군 훈련을 마친 뒤 귀가를 준비하던 참이었다. 준플레이오프가 끝난 후 1군 선수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2군 선수들은 5일 훈련 뒤 2일을 쉬는 훈련패턴을 이어가고 있었다.
“감독님.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할 듯합니다.” 모 팀장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정 감독이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쳐다봤다. 오후 1시 5분이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다음해 재계약이 어려울 듯합니다. 구단 방침이 새 감독을 영입하자는 쪽입니다.”
모 팀장의 목소리가 귀를 솜으로 틀어막은 것처럼 정 감독에게 아득하게 들렸다. 2007년 강병철 전 감독의 천거로 롯데 2군 감독을 맡은 뒤 2시즌을 보낸 정 감독이었다. 부산 사직동의 자취방과 상동훈련장을 오가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낙이었던 그에게 해임통보는 청천벽력과 같았다.
“그래요? 어쩔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정 감독이 휴대전화의 종료버튼을 눌렀다. ‘원래 프로가 이런 게 아닌가.’ 정 감독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정 전 감독의 체념과 달리 많은 롯데팬들과 일부 야구인들은 정 감독의 해임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스포츠춘추>가 정 전 감독 해임을 둘러싸고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핵심 쟁점 3가지와 관련돼 집중 취재했다. 2군 남부리그에서 16.5경기 차로 1위를 차지한 팀의 감독이 해임의 대상이 된 이유와 구단 내 특정파벌과 관련된 소문 그리고 구단의 고유영역인 인사권과 관련된 이의들이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2군 독주의 빛 VS 그림자
6월 중순 부산 사직구장에서 사복차림의 정영기 당시 롯데 2군 감독을 만났다. “로이스터 감독께 보고 차 왔다”는 게 그의 사직구장 방문 이유였다. 정 전 감독의 손에 들려져 있는 A4지에 관심이 갔다.
정 전 감독은“로이스터 감독이 이해하기 편하시라고 2군 선수들을 미 마이너리그 팜 시스템처럼 트리플A, 더블A, 싱글A 3단계로 나눠 정리했다.”
정 전 감독은 그렇게 말한 뒤 “트리플A는 언제든 1군 무대에 투입될 수 있는 즉시전력감이고 더블A는 1, 2년 육성해 1군으로 올릴 선수들이다. 싱글A는 3, 4년을 내다보고 기초체력훈련부터 시작하는 루키들”이라고 설명했다.
정 전 감독이 2군 선수들을 3단계로 정리한 이유는 로이스터 감독의 이해를 돕기 위함도 있지만 스카우트 시절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정 전 감독은 과거 한화 스카우트 시절 이범호,
김태균 등 지금은 한화의 간판스타로 성장한 젊은 선수들을 직접 영입했다. 특히나 1999년 무명의 대구고 내야수
이범호를 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1순위로 지명하며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도박도 그런 도박이 없다”는 우려와 지적을 동시에 받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스카우트한 선수 모두를 성공시키겠다고 마음먹어선 안 된다. 그러면 모두 실패한다. 개인의 능력과 잠재력에 맞춰 순차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그래서 롯데 2군 선수를 3단계로 나눠 로이스터 감독에게 보고했다.” 정 전 감독의 말이다.
승부사 정영기 2군 감독(사진=롯데)
로이스터 감독은 정 전 감독의 브리핑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이 정작 2군에 바란 건 육성보다는 즉시전력감의 공급이었다. “로이스터 감독은 마이너리그 베테랑 감독답게 신인선수 육성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2군에서 1군으로 바로 선수를 올릴 수 있도록 2군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 때문에 2군에선 보기 드문 5인 선발체제를 갖추도록 했고 투수들의 투구수 역시 자신이 직접 관리했다.” 롯데 모 코치의 설명이다.
로이스터 감독은 대개 2군 선발투수의 경우 경기당 70구, 불펜투수는 30구를 던지도록 했다. 1군 승격 시 적응도를 높이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다. 투구수는 월별로 조정했다. 모 코치의 설명을 계속 들어보자.
“선발투수 투구수는 4월 70, 5월 80, 6월부터는 90개로 늘어났다. 투수가 1회부터 난타를 당해도 정해진 투구수는 끝까지 지키도록 했다. 그런 까닭인지 2군 남부리그 투수들 가운데 김유신, 허준혁, 김휘곤, 이상화 등 롯데 투수 4명이 77이닝 이상씩을 던져 최다이닝 10위 안에 들었다.”
육성보다 즉시전력감을 배출하기 위한 투수운용은 1군뿐만 아니라 2군에서도 성적에 있어서만큼은 효과를 발휘했다. 올시즌 롯데는 2군 남부리그에서 55승 11무 24패로 2위 삼성에 16.5 경기차로 앞서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북부리그에서 각각 1, 2위에 오른 상무, LG와 함께 2군의 ‘빅3’로 통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모 팀의 관계자는 “롯데나 상무와 2군 경기를 치르면 워낙 팀 전력이 좋기 때문에 다른 팀들과 할 때보다 더 많이 긴장했다”며 “롯데는 흡사 1군 경기를 하는 것처럼 2군 경기를 치렀다”고 회상했다. 무슨 뜻일까.
“대개 2군은 자신에게 부여된 미션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주안점을 둔다. 포크볼을 시험하기로 했으면 연속해 포크볼만 던지는 식이다. 그러나 롯데 2군은 시험보다는 경기력 향상을 목표로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이번 이닝엔 이 공을 이렇게 던져야지’하는 게 아니라 ‘이 이닝은 어떻게든 (타선을)막아야지’하는 식이었다.”
정 전 감독의 승부욕도 롯데 2군 우승에 한몫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정 전 감독은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승부욕이 대단했다. 3연전 가운데 우리팀이 2연승을 하자 구단버스를 막으며 ‘내일은 우리가 이길 테니 기대하라’고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말은 농담이었지만 눈빛은 진심이었다.”
정 전 감독도 자신의 유별난 승부욕을 인정한다. “경기 중 선수들을 독려하고 분발을 강조한 건 사실이다. 주위에서 보면 ‘2군에서까지 저럴 필요가 있나’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2군이라도 지는 것보단 이기는 게 낫지 않나.”
1군식 2군 마운드 운용과 1군식 경기운영 여기다 정 전 감독의 승부욕이 더해져 롯데는 2군 남부리그에서 시즌 내내 독주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2군 리그에서의 압도적인 승리가 정 전 감독에겐 독으로 작용했다.
롯데의 한 관계자는 “2군은 선수를 육성하는 곳이지 우승이 목적이 아니다”며 “정 전 감독이 즉시전력감 배출에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지만 육성에는 의문부호가 따랐던 게 사실”이라고 솔직한 평을 했다. 이 관계자는 한 예로“신고선수들에게도 기회를 줬으면 했는데 2군에서 그게 잘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이 관계자뿐만 아니라 구단의 고위관계자 역시 정 전 감독이 “유망주 육성에 다소 미흡했던 점”을 해임 사유 가운데 하나로 들었다.
정 전 감독도 구단의 평가에 어느 정도 수긍한다는 자세다. “만약 구단에서 육성과 관련돼 의문을 제기한다면 부인하고 싶지 않다. 사실 2007년
강병철 전 감독이 나를 2군 감독으로 부른 건 1군 성적을 내기 위해서였다. 1군 승격이 가능한 선수들을 2군에서 잘 골라 준비시키는 게 내 역할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든다. 정 전 감독이 승리를 위해 유망주 육성은 뒤로 하고 당장 승리를 견인할 수 있는 1군급 선수들을 경기에 총동원했다면 모르지만 지금껏 그런 혐의를 입증할만한 구체적 사례는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수도권 모 팀의 2군 관계자는 “롯데 2군의 선전은 1군급 선수들이 아니라 유망주들의 맹활약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탐나는 선수들은 죄다 롯데 2군에 모여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덧붙여 “후반기 무리하면서 2, 3경기 차로 2군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면 ‘저 감독 우승에 연연하네’라는 소릴 듣겠지만 16.5 경기차라면 차원이 다른 문제”라며 “2군 감독치고 우승을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대개 2군 감독은 리그 2, 3위를 가장 선호한다. 만약 2군 리그 우승이라도 하면 “누가 육성하랬지 우승하랬나”하는 비판에 시달려야하고 꼴찌를 하면 “도대체 한 게 뭐가 있냐”는 꾸지람을 듣기 때문이다.
정 전 감독이 이끄는 롯데 2군의 독주는 무엇보다 선수들의 기량이 뛰어난데서 찾는 게 온당하다. 만약 그렇다면 정 전 감독은 육성을 등한 시 했다는 비판보다는 박수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게다가 ‘2군에서 지나치게 승부에 집착했다’는 비판도 수정돼야 할 것이다.
수도권 모 팀 2군 관계자는 “이기는 경기를 통해 육성하는 게 더 좋은 게 아니냐”고 반문하며 “만약 정 전 감독이 육성보다 즉시전력감 배출에 주력한 게 흠이라면 그 비판은 1군 감독이 받는 게 정상 아니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부산고 득세 VS 금시초문
이상구 롯데 단장은 정 전 감독의 해임 배경을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다면평가를 실시한 결과”라며 “팀의 미래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밝혔다. 로이스터 감독과의 협의에 대해서는 “충분한 교감을 나눴으며 로이스터 감독이 ‘구단의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전폭적인 지지의사를 나타냈다”고 전했다.
취재결과 이 단장의 다면평가에는 육성 부분을 제외한 몇 가지 문제도 걸림돌이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항간에는 정 전 감독과 모 코치가 투수운용을 둘러싸고 불협화음을 빚었고 이것이 해임의 배경이 됐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정 전 감독은 “2군에 좋은 투수가 많다보니까 모 코치와 의견충돌이 있었던 것 사실이지만 큰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 단장도 “감독과 코치간의 건전한 의사충돌은 당연한 것”이라며 “그 문제가 (해임의)직접적인 배경은 아니었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정 전 감독과 모 코치의 갈등이 구단 고위층에 보고됐고 어떤 의미에서든 그것이 정 전 감독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정 전 감독과 함께 그 코치 역시 유니폼을 벗었기 때문이다.
정 전 감독의 해임을 구단 내 파벌싸움의 희생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특정고교 출신들이 구단을 장악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산고 출신들이 코칭스태프를 독식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구단 내부 관계자들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들이다. 롯데를 잘 아는 인사들도 “과거 경남고라면 모를까 부산고의 득세는 처음 듣는 소리”라는 반응을 보였다.
<스포츠춘추>에서 롯데 1, 2군 코칭스태프의 출신고와 대학을 정리했다.

<표>에서 보듯 부산고 득세의 뚜렷한 혐의는 발견할 수 없다.
양상문 2군 감독과 주형광 재활군 코치가 영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코칭스태프 가운데 부산고 출신은 박계원 2군 수비코치가 유일했다. 오히려 마산상고 3명, 인천고 2명 등으로 비부산고 출신이 눈에 띈다.
혹여 양상문 2군 감독, 주형광 코치 영입이 부산고 파벌의 신호탄이 아니냐는 분석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구단 측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조현봉 롯데 운영팀장은 “주 코치가 현역에서 은퇴한 뒤 구단에서 지바롯데 마린스로 코치연수를 보냈다”며 “프랜차이즈 스타를 코치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원안대로 이행하는 것 뿐”이라며 출신고와 코치영입은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양 감독 영입도 출신고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게 구단 측의 설명이다. 이 단장은 양 감독을 “전임감독이라 팀을 잘 파악하고 지도자로서도 이미 검증된 분”이라고 평가한 뒤 “장기적인 안목에서 모셔온 것”이라며 영입 배경을 설명했다. 여기서 장기적인 안목이란 장기간 2군을 맡겨 선수 육성에 애쓰겠다는 뜻일 수도 있고 ‘포스트 로이스터’로 양 감독을 의중에 뒀다는 소리일 수도 있다.
행간을 어느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장기적 안목’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달라질 수 있다.
인사권은 구단의 고유영역 VS 인사권 비판은 팬의 고유영역
정 전 감독은 17일 해임통보를 받고 현재 경산 집에 머물고 있다. 자신의 해임을 둘러싸고 팬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에 대해 “고맙다”라고 인사를 건넨 뒤 “코칭스태프 인사권은 구단의 몫이라 전혀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다”며 “쉬는 동안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해 좀 더 나은 지도자가 되겠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1985년 롯데에서 현역으로 뛸 때의 정영기(사진=롯데)
야구계 일부에서는 “인사권은 구단의 고유권한이다. 게다가 2군 감독의 교체가 이렇게 화제가 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정 전 감독을 아끼는 분들의 뜻은 이해하지만 지나친 노력은 되레 정 전 감독의 진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반대편의 의견도 만만치 않다. 롯데팬 석영창 씨는 “인사권이 구단의 고유영역이라면 석연치 않은 인사권 행사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는 것은 팬들의 고유권한”이라며 “불명확한 이유로 일 잘하는 지도자를 해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사권 남용”이라고 비판했다.
정 전 감독은 자신의 문제와 관련돼 갖가지 억측과 오해가 난무하는 현 상황을 몹시 버거워하는 눈치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아내는 심장병 수술을 3차례나 받은 바 있는 환자다.
새로운 팀의 러브콜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정 전 감독을 영입하겠다고 나선 팀은 아직 없다. 한화 복귀를 예상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아직까진 불투명하다. 정 전 감독도 이와 관련돼 “들은 바가 없다”고 말했다.
지금껏 1군 감독 경질은 매번 야구계의 화제였다. 팬들의 비판과 저항도 심심찮게 있어왔다. 그러나 2군 감독 경질을 두고 팬들이 이처럼 이의와 부당함을 제기한 적은 거의 없었다. 배경이야 어찌됐든 프로야구의 흥행과 함께 야구팬들의 시선이 1군뿐만 아니라 2군으로까지 확장된 느낌이다. 오해와 억측이 배제된다면 정 전 감독의 경질처럼 2군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충분히 야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그것이 긍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한다면 야구계의 담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팬과 구단이 공존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되고도 현명한 방법은 투명함과 예측가능한 행동들이다. 정 전 감독 경질을 둘러싼 논란이 야구계에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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