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기사전송 2010-08-31 08:24

군대에 가면 운동선수 생활은 끝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더군다나 운동선수가 상무에 가지 못하고 소위 말하는 ‘막군’(현역병)으로 입대하면 그 순간 모든 게 끝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한창 나이 때 공 대신 총을 잡고 2년 동안 생활한다면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모든 속설을 한 번에 뒤집는 이가 있다. 귀신 잡듯 상대 공격수들을 잡아버리는 바로 그 선수, ‘해병대 사나이’ 김원일(24세.포항)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김원일은 숭실대학교에서 축구를 하다 돌연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축구화가 아닌 전투화를 신은 그는 해병대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대학생 축구선수, 해병대에 입대하다

2007년 초, 김원일은 숭실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군 문제를 해결해야 뭐라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군 제대 후 실업팀에 입단하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던 김원일은 빨리 군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K-리그 선수들도 이제는 그 관문이 무척 좁아진 상무나 경쟁률이 무척 센 경찰청에 들어가기에는 버거웠다. 대학생 축구선수 신분인 그를 받아줄 곳은 없었다. 그런 김원일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바로 해병대 자원입대였다.

해병대에 축구선수를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곳은 없다. 그가 선택한 건 소위 말하는 ‘막군’이었다. 상무나 경찰청처럼 밥 먹고 공차는 게 일과인 체육 특기병이 아니라 그냥 2년 동안 구르는 기는 현역으로 지원한 것이다. “이왕 가는 군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저희 집이 김포인데 왠지 해병대에 입대하면 집 근처로 배치 받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거든요.” 김원일의 해병대 자원 입대에 팀 동료는 물론 지도자들까지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원일은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엉뚱한 곳으로 배치 받았다. 그에게는 이때까지 아무런 인연이 없던 포항이 그가 2년 동안 군 생활을 하게 될 곳이었다. “절망적이었어요. 눈앞이 캄캄했죠. 하지만 군 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 보니 오히려 포항에 온 게 잘됐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김포는 주로 경계 근무 위주로 캄캄한 밤에 북한쪽을 바라보고 서 있어야 하는데 포항은 생활이 훈련 위주거든요. 바다로도 많이 나가고 걷기도 많이 걸었어요. 답답한 거 보다야 돌아다닐 수 있는 포항이 훨씬 낫죠.”

서서히 잊혀져 가는 그의 꿈

하지만 김원일은 입대 전, ‘제대하고 실업팀 입단을 준비하겠다’는 꿈을 서서히 잃어갔다. 막상 군대에 가니 이 꿈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등병과 일병 생활을 하면서 워낙 배울 게 많고 신경 쓸 일이 많아 축구는 어느덧 그의 머리에서 잊혀졌다. 실업팀 입단이라는 그의 소박한 꿈은 어느새 제대하고 학교 열심히 다니면서 수업 잘 듣고 졸업 후 직장에 취직하는 ‘더 소박한’ 꿈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상 축구 선수로서의 꿈을 접은 셈이다.

해병대에서 보병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주로 보트를 매고 바다에 나가는 게 일이었다. 그리고 일과가 끝나면 여느 부대와 마찬가지로 경계 근무에 투입됐다. 비록 꿈은 물거품이 된 것 같았지만 김원일은 새벽에 초소 근무를 설 때마다 밤하늘을 보면서 축구와 동료들을 그리워했다. “곽광선(강원), 박주호(주빌로), 정형준(대전) 등이 저와 대학 동기예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축구를 하는 동안 저는 군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초소 근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서글프더라고요. 축구에 대한 그리움도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어요.”

포항에 배치된 해병대는 K-리그 포항스틸러스 경기를 단체로 관람하는 일이 잦다. 김원일도 축구선수의 신분이 아니라 해병대의 일원으로 스틸야드 경기장을 5번이나 찾았다. 하지만 그는 경기 시작 한참 전 여유롭게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고 있는 동료들을 보고 단 번에 달려가 아는 척을 하고 싶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군인 신분이라 경기장에서 개인행동을 할 수가 없었어요. 가서 인사를 나누고 싶은데…. 내가 저 자리에 서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라운드에서 미친 듯 뛰어도 모자랄 혈기왕성한 축구선수는 군인 신분으로 관중석에서 동료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김원일(가운데)은 한 명의 관중이 돼 포항의 경기를 지켜봤다. 그가 있는 곳은 그라운드가 아니라 관중석이었다.

축구로 풀린 군 생활

하지만 그는 선수 출신답게 축구 실력으로 해병대를 휘어잡았다. 자대 배치를 받고 내무실에 들어가자마자 고참들이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보통 신병이 들어오면 군기를 잡는 게 관례지만 김원일만큼은 남다른 대우를 받았다. “군대라는 곳이 워낙 소문이 빠른 곳이잖아요. 벌써 제가 축구선수 출신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어요. 그날이 공교롭게도 주말이었거든요.” 김원일은 자대에 배치 받자마자 바로 공을 차야 하는 천상 축구선수 팔자였다.

“왕고가 저에게 보급형 새 축구화를 던져주더라고요. 군 생활을 해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만큼 파격적인 일도 없을 거예요. 갓 전입온 이등병이 새 보급형 축구화를 신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잖아요. 그리고는 왕고가 저에게 딱 한 마디를 던졌어요. ‘오늘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줘라.’ 정말 이보다 더 중요한 축구 경기는 저에게 없었던 것 같아요.” 김원일은 죽기 살기로 공을 찼다. 파격적인 대우에 걸맞는 실력을 보여줘야 했고 2년 동안 편한 군 생활을 위해서도 멋진 기량을 선보여야 했다.

“세 시간 동안 죽어라 뛰었어요. 드리블하고 개인기 쓰면 밉상으로 보일까봐 고참들이 발만 대면 골을 넣을 수 있게 패스를 갖다 바쳤죠. 경기가 끝난 뒤 고참이 제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하더군요. ‘네 군 생활은 이제 풀렸다.’” 김원일은 군 생활 동안 연대 대표와 사단 대표로 뽑혀 숱한 우승을 일궈냈다. 해병대 1사단 대표로 ‘선진강군! 한마음대축제 하이원 2008 군대스리가’에 나서 전반전만 뛰고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우승을 이끈 김원일은 이어 작전사와 해군 우승을 놓고 격돌한 경기에서도 승리를 일궈냈다. 그는 군 생활 동안 축구로 숱한 휴가증을 받아냈다.

다시 신은 축구화

그는 이 대회에 참가하면서 언론에 자주 소개됐다. 축구선수 출신 현역병이 ‘군대스리가’를 평정하자 많은 언론이 김원일을 조명한 것이다. 대학교에서 그를 지도했던 윤성효 감독(현 수원 감독)도 오랜 만에 언론을 통해 그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윤성효 감독은 ‘(김)원일이가 군대에 가서도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구나’라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김원일이 군에서 제대할 때쯤 그의 부모님이 윤성효 감독을 찾아왔다. “아들이 다시 축구화를 신을 수 있겠느냐”며 부탁해 온 것이다. 윤성효 감독도 “몸 상태가 나쁜 것 같지는 않다”면서 흔쾌히 이 부탁을 받아들였다.

일명 말년휴가라 불리는 3차 정기 휴가를 나간 김원일은 곧바로 숭실대학교에 가 윤성효 감독을 만났다. ‘그동안 군 생활 건강히 잘 했다’는 의미로 인사를 하러 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윤성효 감독으로부터 “다시 함께 축구를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고 결국 짐을 싸들고 곧바로 합숙소로 향했다. 그에게는 달콤한 말년휴가보다 축구가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먹고 마시며 즐길 휴가였지만 김원일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동료들에 비해 2년을 허비한 그는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했다. 그는 2년이라는 시간을 잃었지만 팀 동료들에게는 없는 ‘해병대 정신’이 있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체력도 부족하고 기술도 예전 같지 않았지만 죽어라 노력했다. 해병대의 험난한 훈련도 이겨낸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부대에 복귀해 한 달간의 마지막 군 생활을 하고 명예롭게 해병대에서 제대했다. 2009년 1월, 전역 신고 후 포항을 떠나자마자 그가 달려간 곳도 숭실대학교 축구부의 전지훈련장이었다.


흔히들 군 생활을 한 곳을 향해 소변도 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포항에서 군 생활을 한 김원일에게 그곳은 기회의 땅이었다. ⓒ포항스틸러스

또 다시 ‘운명의 땅’ 포항으로

제대 후 약 1년의 시간이 흘러 그는 K-리그 신인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K-리그 구단의 선택에 반신반의했지만 제대 후 하루하루를 헛되게 보내지 않았기에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는 드래프트 현장에 가지 않고 조용히 집에서 인터넷으로 K-리그 드래프트 문자 중계를 보고 있었다. 순위가 뒤로 갈수록 초조했지만 그의 이름은 계속 모니터에 뜨지 않았다. 낙담하고 있을 때쯤 그의 눈이 커졌다. ‘포항스틸러스 6순위, 김원일 지명’이라는 문자가 모니터에 선명하게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를 진정한 남자로 만든 그곳, 포항이 또 다시 그를 선택했다.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 김원일은 군 생활을 한 그곳에서 또 다시 K-리그 무대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에게 포항은 운명의 땅인 모양이었다. “또 포항이라는 사실에 믿기지 않았어요. 제 인생을 더 멋지게 만들어준 포항이 또 다시 인생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2년 동안 포항에서 지내면서 포항은 제게 정말 익숙한 곳이 됐어요. 포항에 있으면서부터 제 인생이 정말 잘 풀렸는데 K-리그 포항팀에 가면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3년 만에 다시 포항으로 향했다. 2007년, 군기가 바짝든 까까머리 해병대 신병으로 처음 포항에 갔던 그는 2010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K-리그 최고의 팀인 포항스틸러스의 선수 신분으로 기분 좋게 포항에 도착했다. “기분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무한한 영광이었죠. (설)기현이 형 같은 경우는 저에게 영웅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런 선수들과 한 팀에서 뛰게 되다니 이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직도 얼떨떨해요. 배우는 단계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수비 파트너인 (김)형일이 형에게 정말 많이 배우고 있어요.”


김원일(맨 오른쪽)은 이제 당당한 포항의 주전이 됐다. 3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악으로 깡으로’ 이 자리에 올라섰다. ⓒ포항스틸러스

김원일, 이제는 더 큰 꿈을 향해

그는 스틸러스의 일원이 되면서 작은 꿈을 품었다. “입단하고 나서 목표는 딱 하나였어요. 홈에서 단 한 경기라도 뛰자는 게 저의 새로운 목표였죠. 스틸야드에 서서 응원 온 해병대 후배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거든요. 해병대 응원단은 항상 스틸야드의 한 쪽을 가득 채우고 포항을 응원하지만 팀에 대한 애착은 특별히 없어요. 해병대 선배가 여기서 뛰고 있으니 더 열렬히 포항을 응원해 달라는 메시지를 그라운드에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그는 생각보다 빨리 그 꿈을 이뤘다. 지난 7월 붙박이 중앙 수비수 황재원이 수원으로 이적하면서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당시 포항은 연패를 거듭하며 지난 시즌 아시아 챔피언의 위용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특히 수비라인은 부실함을 드러내 많은 질타를 받고 있었다. 지난 7월 25일 수원과의 홈 경기에 나선 김원일은 상대의 파상공세를 한 골로 막으며 1-1 무승부에 기여했고 이후 5경기에 더 나서 완벽한 수비를 보여주고 있다. 포항은 그가 나선 6경기에서 단 6골만을 내줘 전반기의 부실한 모습을 완전히 털어냈다. 김원일이 경기에 나선 후 포항은 3승 3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김원일에게는 특별한 응원가가 있다. 바로 해병대 응원단이 경기 도중 부르는 군가 ‘팔각모 사나이’가 그에게는 응원가다. “후배들이 경기 도중 관중석에서 이 군가를 부르거든요. 이 노래를 들으면 심장이 막 뛰어요. 다른 선수들이 듣기에는 그냥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지나지 않지만 저는 이 노래를 마음속으로 같이 부르면서 뜁니다. 저만 알아듣는 저만의 노래라고 생각하니 더 힘이 나죠.” 그는 매 경기 킥오프 직전 해병대 후배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군 복무 시절 그토록 서고 싶었던 스틸야드의 그라운드에 서 후배들에게 거수경례를 한다.

김원일은 3년 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목표에 도전하려 한다. “축구선수로서의 목표요? 한 팀에 오래 남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10년 후 포항의 단체 사진을 보면서 후배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어요. ‘형, 이때도 우리 팀에 있었어요? 참 징글징글하네요.’ 이게 제 축구선수로서의 목표입니다. 지금까지도 불가능에 도전해 꿈을 이뤘는데 이 목표도 반드시 지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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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조는 뭐하자는거니..ㅎㅎ

네덜란드, 프랑스, 루마니아, 이탈리아가 한조라니..;;
루마니아가 아무리 처진다고 해도, 썩어도 준치인데..
다른 조 가면 8강도 한 번 노려볼 만 하겠구만..

한게임 한게임이 빅매치구나..
내년 6월 기말고사기간에 겹치지 않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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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2008 대진 확정…죽음의 조 탄생 (종합)

[스포탈코리아] 구자윤 기자= '2008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8)' 조대진이 확정됐다.

2일 밤(한국시간) 유럽축구연맹(UEFA)은 내년 6월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 공동개최되는 유로 2008 본선 조추첨식을 벌였다.

그 결과 C조가 죽음의 조로 탄생했다. 네덜란드, 프랑스, 루마니아, 이탈리아가 한 조를 이루게 된 것. 그야말로 어느 누구도 8강팀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네 팀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됐다.

유로 2008 조추첨식을 맞아 행사장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이 열리고 있다.

유로 2000 당시 이탈리아는 대회 개최국인 네덜란드를 준결승에서 꺾고 결승에 진출했으나 프랑스에게 골든골로 무릎을 꿇은 바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2006 독일 월드컵 결승에서 프랑스를 꺾고 6년 전 패배를 설욕했다. 이후 양팀은 이번 대회 예선에 이어 본선에서도 만나면서 라이벌 관계를 이어가게 됐다.

C조에서 그나마 전력상 다소 열세라 할 수 있는 팀은 루마니아 정도 뿐이다. 하지만 루마니아 역시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 특히 루마니아는 이번 대회 G조 예선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1승 1무를 기록, 조 선두로 본선에 오르는 저력을 발휘했다.

한편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러시아는 그리스를 비롯해 스페인, 스웨덴과 함께 D조에 편성됐다. 그리스는 지난 대회 우승팀인 데다가 스페인, 스웨덴 역시 강팀인 만큼 러시아로서는 대회 8강 진출이 험난할 전망이다.

▲ 유로 2008 본선 조추첨 결과

A조: 스위스, 터키, 포르투갈, 체코

B조: 오스트리아, 폴란드, 독일, 크로아티아

C조: 네덜란드, 프랑스, 루마니아, 이탈리아

D조: 그리스,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

사진=유로 2008 조추첨식을 맞아 행사장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이 열리고 있다.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스포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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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축구를 보는 혜안을 얻다

2007/11/28 15:05
김병수, 축구를 보는 혜안을 얻다
포항=이상철 기자 / 2007-11-27




1992년 천재 미드필더 김병수

한국축구사에서 ‘불운의 축구 천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김병수다. 슈팅, 패스, 드리블 등 기본기는 물론 경기 감각 등 축구선수로서 갖춰야 할 재능을 모두 가졌다.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 또한 ‘천재 미드필더’였다. 천재라는 수식어는 아무에게나 붙이는 게 아니다. 데트마르 크라머 전 올림픽대표팀 총감독을 비롯해 세계 유수의 지도자와 선수들은 김병수에 대해 “한국에 이렇게 뛰어난 선수가 있다는 게 놀랍다”고 말했다.

그러나 ‘특별한 축구 천재’ 김병수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의 K리그 기록에도 없으며 1993년 이후 김병수 관련 뉴스도 뜸하다. 부상으로 하늘이 내려 준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던 김병수. 그는 어떤 선수였을까. 그리고 현재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김병수는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 과거의 아픔보다 미래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
사진 김수홍
1986년 경신고

김병수는 강원도 홍천초등학교 시절 축구에 푹 빠졌다. 축구부 친구들이 축구공을 갖고 노는 걸 보며 따라하다 축구선수의 길을 걷게 됐다. 1982년 서울 미동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김병수의 성장에 결정적인 연결 고리였다.

포항제철의 한흥기 감독이 김병수의 재능을 높이 사 포항제철 선수단 숙소로 데려왔다. 그리고 최순호, 박창선 등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시켰다. 어려서부터 대표선수들의 경기와 훈련을 보고 배우면서 기량이 몰라보게 늘었다. 경신중, 경신고에 진학해서도 포항제철 숙소에서 계속 생활했다.

김병수는 어려서부터 또래 가운데 최고의 기량을 뽐냈다. 당연히 유명세를 탔다. ‘한국축구의 희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곽경근 여의도고 감독은 김병수에 대해 “정말 천재였다. 누구에게도 ‘천재’라는 별명이 따르지 않았다. 오직 (김)병수의 것이었다”고 말했다.

김병수는 “특별히 다른 선수들보다 잘났다고 느낀 건 없다. 선수생활을 빨리 그만둬 어린 시절의 기술일 뿐이다. 그러나 일종의 감각이 있었다. 남들에게 없는 감각이다”라며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가 그 시절 최고의 선수였다. 내 우상이었다. 돌이켜보니 내 플레이가 플라티니 스타일에 상당히 가까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순탄하던 김병수에게 시련이 닥쳤다. 1986년 경신고 1학년 때였다. 왼쪽 발목이 굉장히 아팠다. 뛰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감독의 지시로 며칠을 쉬니까 괜찮아졌다. 통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김병수는 “뛰고 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무리가 갔다. 몸이 굉장히 안 좋아졌다. 발목 인대가 심각할 정도로 늘어난 것은 나중에 알게 됐다”고 기억했다.

마냥 쉰다고 낫는 것도 아니었다. 근본적인 문제인 부상의 싹을 잘라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술을 하고 재활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재활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작은 부상이 쌓이고 쌓여 큰 부상이 돼 선수 생명을 위협했다. 그렇게 그라운드를 떠난 선수가 많았다.

김병수는 이에 대해 “단순히 잠깐 아픈 게 아니었다. 충분히 시간을 갖고 치료와 재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엔 축구선수가 수술을 하면 축구화를 벗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압박 붕대로 감는 등 그냥 버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왼쪽 발목에서 시작된 부상은 방치된 상태에서 왼쪽 무릎으로 번졌고 오른쪽 발목과 무릎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병수는 1987년 7월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U-17 월드컵에 출전했으나 부상의 여파로 1분도 뛰지 못한 채 벤치에서 친구들이 뛰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1992년 올림픽대표팀

김병수는 고려대 1학년인 1989년 6월 대통령배대회 때 태극 마크를 달았다. 그리고 뛰어난 플레이로 이회택 감독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회택 감독은 대표팀 숙소인 타워호텔에서 김병수를 따로 불러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 데려갈 테니 수술부터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수술 비용이 없어 하지 못했다. 더구나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 출전을 강행하면서 부상이 악화됐다. 그때부터 1년에 1경기씩만 뛰고 남은 시간은 쉬기만 했다. 당연히 이탈리아월드컵 출전은 물거품이 됐다.

김병수는 “고려대 시절 4경기를 했다. 그 가운데 3경기가 고연전이었다. 난 정기전용 선수였다”며 “당시 고연전의 의미는 상당했다. 1년 쉬고 1,2주만 운동하고 경기를 했다. 아팠으나 그라운드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다만 내 스스로 (부상을)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게 아쉬울 뿐”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김병수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리고 수술 후 재활 없이 다시 뛰어야 했다. 상태는 점점 악화돼 갔다. 3개월 이상 훈련하지도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크라머 총감독과 김삼락 감독 체제의 올림픽대표에 뽑혔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훈련을 못해도 되니까 경기만 뛰라는 것이었다. 현재 대표팀 체제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가능했다. 그만큼 김병수의 가치는 대단했다.

김병수는 “그냥 쉬고 있는데 올림픽대표팀에서 오라고 했다. 2년 만의 대표팀 복귀였다. 외국인 피지컬 트레이너가 나를 전담해 재활을 도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해본 재활 치료였다”고 말했다.

김병수는 올림픽대표팀 코칭스태프의 기대에 부응했다. 1992년 1월 18일부터 30일까지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최종예선에서 맹활약하며 올림픽대표팀의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특히 1월 27일 벌어진 일본과의 4차전에서 김병수의 플레이가 빛났다.

한국은 일본전 이전까지 1승1무1패로 본선 출전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일본전에서 반드시 이겨야 했다. 한국은 일방적으로 일본을 몰아붙였지만 수차례 얻은 득점 기회를 놓쳤다. 경기 종료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그때 김병수가 일본 골문 앞에서 뒤로 떨어지는 공을 발리 슈팅했다. 볼은 원 바운드로 크게 튄 뒤 골문 위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경기에서 공격수로 뛰었던 곽경근 감독은 “(김병수는)득점 감각이 뛰어났다.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슈팅하는 순간 골이라는 걸 직감했다”고 기억했다. 김병수도 일본전 결승골을 가장 기억에 남는 골로 꼽았다. 김병수는 “최종예선 직전 근육을 다친 상태였다. 그래서 훈련 한번 못하고 경기를 했다. 그 상태에서 어렵게 골을 넣었다. 비껴 차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볼이 떴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승리로 한국은 최종예선 통과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경기가 올림픽대표팀의 최종예선 무패 행진(18승3무, 11월 16일 현재)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김병수에게는 선수로서의 마지막 무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올림픽 최종예선을 마친 뒤 무릎 수술을 해 바르셀로나올림픽 본선에는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 김병수는 국내에 없었다.

김병수는 1992년 1월 27일 바르셀로나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일본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한국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연합포토
1997년 나고야 코스모석유

1993년 고려대를 졸업한 김병수는 K리그 무대를 두드리지 않았다. 부상 후유증으로 각 구단이 김병수의 영입을 꺼린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모든 구단이 그런 건 아니었다. 이회택 감독의 포항제철은 재능 있는 선수들을 스카우트하면서 홍명보, 황선홍에 이어 3번째로 김병수를 선택했다. 그렇지만 김병수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발목 상태가 온전치 않아 선수로 뛰기 어려웠다.

훈련도 못하는 선수가 프로 세계에 있다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축구를 그만두려 했던 김병수는 한국이 아닌 일본행을 택했다. J리그가 아닌 실업축구팀(J2리그)이었다. 훈련 없이 경기만 뛰고 팀에서 수술과 재활 치료를 돕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연봉도 수당을 포함해 2억 원 수준이었다. K리그에는 연봉 1억 원 선수도 없던 시절이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나고야 코스모석유에서 뛰었다. 선수로서 가장 오랫동안 운동을 했다. 무리하지 않다 보니 몸도 상당히 좋아졌다. 그리고 26살이 되었을 때 뒤가 보일 정도로 축구에 눈을 떴다. 한국 국가대표팀에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훈련을 하지 못했다. 대표팀 합류는 불가능했다. 김병수는 “가장 행복했다. 일본에서 뛰었던 모든 경기가 다 기억에 남는다. 정말 편안하게 경기를 했다”고 말했다.

김병수는 1997년 28살의 나이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고질적인 부상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미련도 없었다. 모든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 들였다. 김병수는 “내 스스로 관리를 못한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내 부주의였다. 운명론에서 봤을 때 난 정말 이만큼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불운의 축구 천재’라는 평가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난 절대 불운하지 않다. 또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다만 아쉬운 게 딱 하나 있다. 한 번이라도 아프지 않은 상태에서 90분을 뛰었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다. 다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다.”

2007년 포항 스틸러스

김병수는 현재 포항 스틸러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2003년부터 시작해 벌써 5년째다. 공식 직함은 기술부장이다. 1, 2군 코치를 맡았다가 올해부터 기술부장 일을 하고 있다. 국내 유망 선수를 스카우트하고 포철동초-포철중-포철공고로 이어지는 유소년 시스템을 관리한다. 1군 선수들에 대한 평가도 빼놓지 않는 등 포항 구단의 전반적인 운영에 관여하고 있다.

올시즌 포항이 K리그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던 데에는 김병수의 공도 있다. 포항의 한 관계자는 “(조)성환이가 자존심이 강해 외부 지적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김부장의 말이라면 다르다. 바로 자신의 단점을 고친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김병수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3년간 포철공고 코치를 맡았다. 박원재, 황진성, 신화용 등 포항의 우승 주역들과 오범석(요코하마 FC)이 김병수의 지도 아래 컸다. 황진성은 “김부장님의 지도를 받고 싶어 일부러 포철공고로 전학왔다”고 했다.

김병수는 제자들이 어느덧 포항의 주축 선수로 성장한 것에 대해 만족스러워했다. “볼은 좀 찼지만 빌빌대던 아이들이었다.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 몰랐다. 내가 가르쳤던 선수들이 커가는 걸 보니 흡족하다. 다만 (남)익경이, (이)수환이(이상 광주) 등 기대보다 못 큰 선수도 있어 아쉽다.”

11월 11일 탄천종합운동장에서 포항 선수단이 우승 후 헹가래를 치고 있을 때 김병수는 한편에서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김병수는 언젠가 다시 지도자의 길을 걷겠다고 했다.

김병수는 포항 스틸러스의 기술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올시즌 포항 K리그 우승의 숨은 공신이다.
사진 김수홍
“선수보다 지도자가 더 내 적성에 맞는 것 같다. 과거보단 현재가 중요한 것이다. 난 지도자로서 행복하다. 공교롭게도 고질적인 부상이 내게는 축구를 볼 수 있는 지혜를 더 빨리 줬다. 언제나 그렇듯 운동장이 그립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그라운드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 삶의 중심은 축구다. 지금껏 축구가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내 지도 방식은 휴머니즘을 깔고 있다. 축구도 인간이 하는 것이다. 감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다.”

김병수에게 마지막으로 한국축구에 대해 아쉬움이 없느냐고 물었다. 부상과 재활에 관련된 답변은 나오지 않았다. 돌아온 대답은 색깔 없는 K리그였다. 김병수는 “지도자는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 힘들더라도 어린 선수들을 키워 선수층을 밑에서부터 잘 다져야 한다.

또 각 팀은 우승을 목표로 할 게 아니라 저마다의 특색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축구의 미래가 어디 있겠나. 올시즌 포항의 우승이 자극제가 됐을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박종환, 병수 보러 안 오나”

소년 김병수는 타고난 천재였다. 거기에 노력파였다. 김병수는 “재능은 타고 나야 한다. 그렇지만 노력 없이 성공할 수는 없다”며 “정말 축구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 잠 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포항제철의 숙소는 서울 잠실의 장미아파트 근처에 있었다. 그곳에는 잔디 구장이 있었다. 축구에 푹 빠진 김병수에게는 최고의 훈련장이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쉬지 않고 축구를 했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면 불을 밝히고 기량을 연마했다. 그런데 훼방꾼이 생겼다. 숙소 관리 아저씨였다. 밤마다 운동을 하니 전기요금이 만만치 않았다. 또 당시 잔디 상태도 좋은 편이 아니라 관리가 필요했다. 김병수가 매일 운동을 하니 피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병수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쫓아 내면 다른 잔디 구장으로 가서 운동을 했다. 숨바꼭질이 이어지면서 훈련장을 한 바퀴 돌았다. 1년간 실랑이가 계속되다 보니 결국 관리 아저씨도 두 손을 들었다. “빨리 대표선수가 되도록 해라. 그런데 박종환은 (김)병수 보러 안 오나.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걸 봐야 하는데.”

김병수는 박종환 전 대구 감독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김병수가 대표팀에서 활약할 때에는 이회택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지휘했다. 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박종환 감독이 대표팀을 맡았으나 그때 김병수는 수술을 하고 쉬고 있었다.

SPORTS2.0 제 78호(발행일 11월 19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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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감독설' 울리에와 한국 축구의 인연

[스포탈코리아] 서형욱 기자=축구협회의 외국인 감독 협상 창구로 알려진 가삼현 사무총장이 출국한 가운데, 현재 축구협회 안팎에서는 프랑스 출신의 제라르 울리에 감독이 '1순위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울리에, 차기 한국 감독 후보 1순위?

화려한 프로 선수의 경력은 없지만, 매력적인 감독 경력을 갖고 있는 울리에는 대학 시절 영문학을 전공하고 리버풀에서 젊은 시절 짧게, 그리고 감독 시절 오래 머물러 유창한 영어 구사력을 자랑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협회가 유독 중요하게 여기는 '영어 구사력'이 뛰어나면서 현재 '놀고 있는' 몇 안되는 유명 감독이 울리에라는 사실은 협회가 그를 1순위 후보로 점찍었다는 사실에 신빙성을 더한다.

2006/07 시즌 올랭피크 리옹의 프랑스 리그 우승을 이끈 뒤 일신 상의 이유로 감독직을 놓은 그는 프랑스 PSG 시절의 리그 우승과 리버풀 시절 UEFA컵 우승을 비롯해 수 많은 트로피를 거머쥔 바 있는 명장이다.

여러 번의 우승, 그러나 비난 일색이던 리버풀 시절

하지만 호시절만 있던 것은 아니어서 리버풀 시절에는 재미없는 '뻥 축구(Long-ball)'로 팬들의 극렬한 비난을 받았고 프랑스 대표팀 감독 시절에는 전임 플라티니 감독(현 유럽축구연맹 회장)이 틀을 잘못 잡은 팀을 이어받아 94년 월드컵 탈락의 멍에를 홀로 뒤집어 썼다. 그러나 프랑스 축구협회는 그의 능력을 인정해 이후에도 계속 기술위원으로 일했다.

필자가 리버풀에 거주했던 1년 여(2003년 7월~2004년 10월)는 리버풀 울리에 시대의 마지막 시기였다. 당시 리버풀 팬들은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울리에 축구를 맹렬히 비난했는데, 리버풀 구단의 연습 구장 벽에는 '울리에 감독, 에이즈나 걸려 죽어버려(Hope you die of Aids Houllier)'라는 낙서가 그려질 정도였다. 리버풀 팬들이 울리에의 축구를 싫어했던 이유는 그가 최전방에 마이클 오언-에밀 헤스키 두 선수를 박아둔 채 롱패스로 공격을 전개하는 '수비 강화' 전술에 주력해서다. '뻥축구'를 펼친다는 이유로 핌 베어벡 감독을 몰아냈던 게 불과 몇 달전의 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러나, 울리에가 늘 비난만 받았던 것은 아니다. 리버풀이 그가 떠난 바로 다음 시즌, 그가 영입했던 선수들로 챔피언스리그 우승(2004/05)을 차지했는데 이 성과에서 울리에의 몫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또, 그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우승을 차지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으로 평가된다. 당시 그는 특별 공로 메달까지 받았다. 특히 그는 90년대 프랑스 대표팀의 유망주 육성 정책 수립 과정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과정에서 티에리 앙리, 다비 트레제게 등 현재 수퍼 스타로 자란 수많은 선수들의 성장에 기여한 바 있다.

한국 축구에 '한 수' 가르치다

울리에가 한국 축구와 인연을 맺은 것도 그 무렵이다. 94년 월드컵 진출에 실패한 이후 프랑스 축구협회에서 일하던 그는 지난 1996년부터 2년간 프랑스 20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1997년 말레이지아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월드컵에서 울리에의 프랑스는 박이천 감독(현 인천 감독)이 이끌던 대한민국과 조별 예선에서 만났다. 결과는 프랑스의 4-2 승리. 스코어는 두 골 차였지만 경기 내용은 참혹했다. 당시 프랑스는 이른바 '황금 세대'격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멤버 면면이 '엄청나게' 화려했다. 티에리 앙리(FC바르셀로나), 다비 트레제게(유벤투스)가 투톱으로 나섰으며 수비진에는 빌리 사뇰(바이에른 뮌헨), 빌리암 갈라스(아스널), 미카엘 실베스트레(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포진해 있었다. 더군다나 후반전에는 최근 맨유를 꺾어 또 한번 화제가 된 니콜라 아넬카(볼튼)가 교체 공격수로 출전했다.

당시 프랑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한국팀은 초반부터 상대의 맹공에 흔들렸고 경기 시작 3분 만에 앙리와 트레제게에게 각각 1골씩을 헌납한 데 이어 전반 10분 앙리에게 한 골을 더 추가 허용, 순식간에 0-3으로 끌려가며 전의를 상실했다. 후반 7분 트레제게에게 네 번째 골을 내준 한국은 이후 다소 느슨해진 프랑스를 상대로 박진섭(성남 일화)이 2골을 터뜨린 데 힘입어 2-4로 경기를 마쳤다. (마지막 골은 실베스트레의 파울로 얻은 PK골이었다.)

[이관우, 안효연(이상 수원 삼성), 서기복(인천), 심재원(부산) 등이 포진해 언론에서 '역대 최강'이라고 추켜세웠던 당시의 한국 팀은 정보 부족으로 인한 대처 미흡으로 울리에의 프랑스에 완패한 뒤 3일 뒤 벌어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전반에만 무려 6골을 내주는 참혹한 난조 속에 3-10으로 완패하며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저 유명한, '쿠칭의 비극'이다.] 무려 10년도 넘은 과거의 얘기지만, 울리에와 한국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현지에서 협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보도가 어느 정도까지 사실인 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가 한국 감독직을 수락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당시 경기 장면을 꽤 자주 TV를 통해 접하게 될 것 같다.

제라르 울리에, 과연 올까?

울리에 영입설의 진척 사항은 잘 알 수 없지만, 그가 온다면 적어도 두 가지는 확실하다. 첫째는 '재미있는 축구'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 그리고 두번째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를 통해 한국의 유소년 시스템이나 국제적인 네트워크 구축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협회 입장에서는 여러 모로 힘든 선택이 될 것이다. 알려진대로 그는 '상당히' 고집스런 성격의 소유자여서 (협회와는 달리) 언론의 평가보다는 본인의 소신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름값'도 높은 사람이니 협상이 진행중이라 하더라도 한국행 가능성이 높진 않아 보이지만 그가 만일 14년 전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프랑스 대표팀 감독 시절)의 '한'을 풀고 싶다면,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도 그에게는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물론, 진난 2001년 프리미어리그 리즈와의 경기 하프타임때 급작스런 심장 마비로 수술대에 올랐던 병력과 리옹 감독에서 물러날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면 건강 상태에 대한 점검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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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아' 올레게르, 현대 축구계에 쓴소리

[스포탈코리아] 구자윤 기자= '축구계의 이단아' 올레게르(27, 바르셀로나)가 다시 한 번 쓴소리를 했다.

카탈루냐 출신의 올레게르는 좌익 성향을 지닌 선수로 정평이 나있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연고지 카탈루냐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있는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축구 선수임에도 경제학 학위를 이수했으며 문화, 정치 컬럼에도 종종 글을 게재한다. 지난 2월에는 한 칼럼을 통해 바스크 지방의 법적 독립성에 의문을 제기, 파문을 낳으면서 축구화 협찬이 끊기기도 했다.

그가 이번에는 20일(현지시간) 스페인 잡지 < 올레 > 와의 인터뷰를 통해 현대 축구계를 비판하고 나섰다. 올레게르는 먼저 " 사람들이 나를 별종으로 취급하는 것에 지쳤다 " 며 " 이런 걱정을 하는 선수는 나 말고도 많다. 축구선수들은 단순히 공만 좇는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다 " 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가족들과도 정치 얘기를 나누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자 " 이상한 질문 " 이라며 성을 냈다. 오히려 " 당신은 뉴스, 현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가족과 얘기하지도 않는가? 그건 모든 집에서 일상적인 것 " 이라고 반문했다.

이어 화젯거리는 축구로 넘어갔다. 올레게르는 " 너무나도 많은 돈과 권력이 축구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지나치게 많은 중개인들이 있다 " 며 " 돈을 벌기 위해 투어가 맞춰지며 경기 일정과 스케쥴은 상업적 이익과 TV 광고를 위해 짜여진다 " 고 지적했다. 클럽들이 돈에 얽매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이런 상업적인 태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는 반응도 보였다. " 나는 이와 같은 부분을 비판하면서도 클럽들이 돈을 버는 게 결국 선수들 연봉을 부담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선수들 대다수가 이 점에 대해 얘기하길 꺼려한다 " 는 게 그의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바스크 지방의 법조계를 비판했던 것에 대해 "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 며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번 인터뷰만 봐도 올레게르의 정치적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사진=축구계의 이단아 올레게르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스포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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