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대기 8강 고교야구 홈스틸

2010/08/19 01:39
야구 본 지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홈스틸을 보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더군다나 주자 1,3루시에서 1루 주자가 2루로 도루하는 동안 3루 주자가 홈을 파고드는 형태가 아닌,
이렇게 단독으로 3루 주자가 홈스틸을 하는 장면은 더더욱 드물다..
(기억나는 것으로는 박재홍 선수가 한창 때 3루에서 홈스틸 하던 장면..)

이때까지 본 홈스틸 장면 중에서 제일 화려하고 깨끗하며 멋진 홈스틸인듯..

그나저나 투수랑 포수는 뭐한거냐..-_-;;
리플레이 보니까 투수가 만루 상황에서 설마 뛰겠냐 싶어서 보지도 않고 그냥 던진 듯..

암튼..오래간만에 시원한 홈스틸 구경 했습니다~!!

p.s 이 동영상을 본 게시물의 댓글에 따르면

결과는 6번 선수 8강전에선 홈스틸로 진기명기 연출했는데..
결승전에선 한점차 승부였는데..
마지막 중요한 순간에.. 희생번트 지시 내려왔는데..
자기가 번트 치고 살기 위해서 계속 무리하게 몸부터 움직이는 우매한 짓을 해서..
팀 점수 찬스 무산시키고..결국은 군산상고가 9회말 동점 내주고 10회말 역전당해서 준우승했음..

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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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홈스틸, 그 명품과 짝퉁의 세계

홈런이 야구경기의 꽃으로 불리는 이유는 가장 화려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홈런에 뒤지지 않는 또 하나의 꽃이 야구에 있다. 바로 홈스틸이다.

수비측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느닷없이 홈으로 파고드는 주자를 보고 있노라면 잠시나마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야구의 '얼음 꽃' 같다고나 할까?

2007시즌 한국프로야구는 프로통산 21번째의 홈스틸을 탄생시켰다. 그 주인공은 SK 와이번스의 김강민(26). 2005년 8월 27일 박재홍(SK) 이후 거의 2년만이었다. 그런데 김강민의 홈스틸이 21번째의 공식 단독 홈스틸로 인정받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려야 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당시 경기상황을 잠시 되돌려보자.

8월 16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대 삼성전 7회말, 1사 만루상황에서 3루주자였던 김강민은 투수 권오준이 2루주자에게 견제구를 던지는 틈을 이용해 홈으로 달려들었다. 이를 막아야 했던 삼성은 2루로 베이스커버를 들어갔던 박진만이 공을 떨구는 바람에 아예 공을 홈에 던져보지도 못한 채 김강민의 득점을 멀뚱히 지켜봐야 했다.

여기서 홈스틸은 차치하고, 김강민의 홈 대시가 도루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스타트를 끊은 시점이 유격수 박진만이 공을 놓치기 이전이라야 하는데, 이 점에서는 결격사유가 없었다.

다음은 이날의 관심사였던 김강민의 단독 홈스틸 인정여부다. 결과적으로 만루상황에서 기록상 도루를 실행한 주자는 3루주자 김강민 하나였다. 1루주자와 2루주자는 원래 있던 루에 그대로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야구 기록적으로는 어디를 따져봐도 당연히 단독 홈스틸인데, 문제가 된 것은 다른 주자에게 신경을 쓰는 사이에 이뤄진 김강민의 득점 모양새였다.

2루주자에게 투수가 견제구를 던지지 않았더라면 김강민의 홈스틸은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정황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무늬만 홈스틸', 홈스틸은 맞는데 순도(純度)가 문제였던 것이다.

김강민 이전에 완성된 20번의 홈스틸 중에서 1루나 2루에 주자가 전혀 없는 순도 100%의 단독 홈스틸은 딱 절반에 해당하는 10번이다.

상대팀이나 팬들을 잠깐 동안 얼음으로 만들었던 그 주인공들은 다음과 같다. 김일권(해태. 1982), 이광은(MBC. 1983), 송재박(OB. 1988), 김동기(태평양. 1989), 김성갑(빙그레. 1989), 이종호(빙그. 1990), 김응국(롯데. 1991), 김인호(태평양.1992), 김승권(한화.1995) 그리고 박재홍(SK, 2005) 등이다.

나머지 10차례의 단독 홈스틸은 모두 다른 루에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주자가 있었던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김강민의 도루를 단독 홈스틸로 인정하는 문제는 전례에 비춰보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나올 때마다 단독 홈스틸로 인정할 것인가를 놓고 골머리를 앓는 이유는 단독 홈스틸에 관한 인정기준이 두루뭉수리하기 때문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가면 된다는 식이 아니라 '정도(正道)는 하나'라는 생각으로 단독 홈스틸에 관한 범위를 좁혀 볼 필요가 있다.

여담으로, 김강민의 경우를 보면서 지금까지도 궁금증을 해결하지 않은 문제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국민타자 이승엽의 단독 홈스틸이다.

이승엽(당시 삼성)은 1997년도의 유일한 단독 홈스틸 기록자다. 발이 그다지 빠르지 않은 이승엽이 어떻게 단독 홈스틸을 기록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겠지만, 바로 김강민의 경우와 비슷한 경우였다.

그런데 이승엽 단독 홈스틸기록 인정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스타트 시점이 언제였는지가 아직까지도 미제(謎題)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3루주자였던 이승엽이 공이 빠진 것을 보고 나중에 스타트를 했는지, 아니면 포수의 다른 루로의 송구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스타트를 끊었는지.

만일 나중에 스타트를 끊었다면 그것은 홈스틸이 아니라 실책에 의한 득점이다. 물론 이후에도 경기장에서 마주칠 기회가 수없이 많았지만 부러 묻지 않았다.

앞으로도 김강민이나 이승엽과 같은 경우를 언젠가는 또 맞닥뜨리게 될 것은 자명하다. 이쯤에서 단독 홈스틸에 관한 통계에 좀더 냉정하게 대처, 순수한 단독 홈스틸과 기타 홈스틸(더블스틸 포함)로 구분 짓는다면 현재의 흐릿한 단독 홈스틸 기준이 좀더 선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한편 단독 홈스틸과 연계된 문제에 있어 기록상으로 또 하나의 난제가 숨어있는데 다음 편에 끄집어내기로 한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회 1군 팀장

< 사진 > 2007년 8월 16일, 인천문학구장에서 단독 홈스틸을 성공 시키고 의기양양해 하는 SK 김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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