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시스 중고차 사려던 직장인 `허`자에 그만…

매일경제 |입력 2012.08.05 12:17

http://auto.daum.net/review/newsview.daum?page=1&newsid=MD20120805121710887

직장인 A씨는 최근 마음에 꼭 드는 중고차를 발견했다. 2010년식 제네시스 차량으로 연식대비 주행거리도 짧아 마음에 쏙 들었다.

A씨는 좋은 매물은 빨리 거래가 성사될 거란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담당 딜러와 약속을 잡고 바로 계약을 하려했으나 평소 중고차 지식이 해박한 친구의 조언이 발길을 붙잡았다.

조언인즉 자동차등록원부부터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으로 확인해 본 해당차량의 자동차등록원부, 그러나 그 한 장의 서류는 A씨의 눈을 의심케 했다.

해당차량의 변경 전 번호판에 떡하니 '허'자가 쓰여 있었던 것. 결국 A씨의 마음에 쏙 들었던 제네시스 중고차는 렌트카에서 용도 변경된 차량으로 연식대비 짧았던 주행거리도 의구심이 들게 했다.

번호판 변경 내용 확인시 이전 번호판에 '허'자가 있다면 렌트카, '아, 바, 사, 자'가 있다면 영업용 택시 차량으로 주의해야 한다.

흔히 렌트카 부활차, 택시부활차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 같은 중고차량의 구매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중고차의 용도 변경 사실을 구매자가 인지한 상태에서 제대로 책정된 가격에 구매한다면 오히려 경우에 따라 득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속여 높은 가격에 파는 것이다.

자동차등록증이 주민등록증과 같다면 자동차등록원부는 호적등본에 비할 수 있다. 자동차등록증에는 차량의 제원, 등록번호판 교부 등의 주요정보가 기록돼 있다.

또한 자동차등록원부는 갑부와 을부로 나눠진다. 갑부에는 해당 차량의 최초 소유주부터 자동차 검사 받을 때마다 당시의 주행거리와 함께 영업용, 대여용, 관용 등의 차량용도 변경 내역이 기재돼 있다. 자동차등록원부 중 을부에서는 차량의 압류나 저당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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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화장지 심에 도대체 무슨 일이??

2010/09/30 09:24
-- Toilet Paper Roll Art --

"화장지 심"이란 쓰고나면
단지 쓰레기 휴지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불요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하기 쉽지만
그런 심을 연극과 같이 예술로 표현한 뛰어난 작품이 있다.



두루마리 화장지 심으로 만든 예술품 -1

종이 조각가 Jacquet Junior씨의 천태만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루마리 화장지 심으로 만든 예술품 -2

파리 출신 아티스트 Anastassia Elias씨의
화장지 심의 별 세계를 소개한다.

공간을 훌륭히 활용한 권투시합 장면








지하도의 청소부들








낚시꾼








월드컵의 슈팅 장면








사교 댄스에 열중인 커풀들








동물원의 기린 가족을 바라보는 인간 가족








반대쪽에서 본 동물원 나들이 가족









눈사람 만들기에 열중인 어린이들








화창한 날씨에 빨래널기








수업중인 교실에서








서민들의 시장










휴식중인 오후






일상생활에서 단지 버리기 마련인 천덕꾸러기 "화장지 심"
그러나 예술로 변모한다는 그 소재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화장실 심을 이용한다는 발상이 놀랍지만
약동감과 부드러움 등에 감싸인 작풍자체가 멋진 아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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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기호 Wo

2010/03/30 13:54
난 이런 개그가 좋아..ㅎㅎ

혹자는 PC통신 시절부터 돌아다니던 개그라던데, 나는 처음 봤으니까 패스~!!
좀 있으면 원소기호 Ma 버전도 출시될 듯..ㅋㅋ

그나저나 정말 적절하게 특성을 잘 끄집어내어서 기술한 듯..;;

오래간만에 실컷 웃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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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원소기호:Wo (원형:woman)


2.원자량:일반적으로 45㎏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35㎏부터 85㎏까지 다양하다.가끔 100∼200㎏에 달하는 동위원소가 발견되기도 한다.


3.물리적 특징

1)표면은 대개 엷은 가루막(화장,분장,변장)과 겹겹의 천으로 쌓여 있다

2)별 것 아닌 것에 끓고(비등점),이유 없이 언다.(빙점)

3)적절하게 가공처리하면 다시 녹는다(융점).


4.화학적 특징

1)비싼 물질을 엄청나게 많이 흡수하는 능력이 있다.

2)일반 액체에는 반응하지 않으나 알코올을 흡수하면 활동에너지가 엄청나게 증가한다.

3)Au, Ag, Pt 등의 보석과 친화적이다.

4)빛이 차단된 실험관에 원소 Wo와 M(man)을 넣을시 특정 조건이 만족되면 1:1 반응을 한다.
   특정 조건이 만족 되지 않은체 이 같은 실험을 하면 큰일난다

5)최근 연구에 의하면 M이 원소붕괴를 해 Wo로 되기도 한다.


5.주의할 점

1)취급에 능수능란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하다.

2)특정 상황 외에서 둘 이상을 동시에 취급하는 것은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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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원문 기사전송 2010-02-18 03:40 최종수정 2010-02-18 09:38

한동안 잊고 있었던 사진을 문득 메모리칩에서 꺼내 모니터에 띄워볼 때면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다. 사진을 찍던 그 순간의 감상은 사라진 지 오래, 이젠 '오늘'의 눈으로 사진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진과 닮아 있다. 만나고 사랑하고, 아파서 헤어지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사진을 찍던 날의 단순한 열정일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과거를 추억이란 채색으로 불러낼 때, 사랑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지난날 서로 주고받았던 행동이나 말이 그때의 과잉된 감정 때문에 다른 뜻으로 전혀 이해했거나 전달됐던 건 아닌가 의심해 보자는 것이다.

달콤했던 연애 초기를 넘기면 싸움도 늘어난다. 소소한 것들에 핏대를 세우며 죽기 살기로 싸웠던 것 같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열정의 과잉?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하기 때문에 싸운다'라는 문장 안엔 함정이 숨어 있다. 싸움마저도 사랑 때문에 했다는 면죄부를 발부하고 싶어 하지만 더 깊은 곳엔 두려움과 치졸함, 그리고 이해 부족이 있음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슬프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결국 '정점'이니까. 정점 뒤엔 내리막길뿐. 그 불안감 속에서 신경은 바늘처럼 곤두서 상대의 사소한 행동에도 무리한 해석을 가하고, 비난을 퍼붓는다.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사랑에 빠졌다는 한 후배는 연인이 된 후, 그녀에게 웃지 말기를 요구했다. 그녀의 웃음에서 느꼈던 감정을 다른 누군가가 느끼게 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웃음이 헤프다'는 경솔한 지적이 이어졌고, 웃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후배의 어리석음은 결국 이별이란 결과로 돌아왔다. 시간이 흐른 후, 후배는 고백했다. 그녀가 많이 웃었던 것은 자신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사랑은 때때로 너무도 잔인하다. '사진은 그 사진이 걸린 장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는 수잔 손택의 이야기처럼, 사랑은 그 사랑을 쳐다보는 장소와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변덕쟁이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한데 표현 방식엔 차이가 있다. 남자는 다정하고 자상한 성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여자는 전화나 문자를 자주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랑은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 남자는 결국 이별을 통보했다. 그리고 다른 여성을 만났다. 남자는 훗날 조심스럽게 말했다. 현재 만나는 여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온다고. 처음엔 그게 관심이라고 생각했지만, 바쁜 시간 계속되는 전화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고. 그때야 비로소 예전 여자 친구가 들려준, '배려'라는 단어가 이해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어쩌면, 현재의 여자 친구와 헤어지면, 그 남자는 똑같은 후회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 복잡한 사랑에 한 가지 정의를 내리는 우둔한 짓은 하지 않겠다. '지나간 사랑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뻔한 문장도 반복하고 싶진 않다. 단지 중요한 건 지금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일들이 나중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열정에 휩싸인 채, 혹은 이별의 두려움 때문에, 지금의 독해는 언제나 오독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김태훈·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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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꽤나 재치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명인 김태훈씨..
 
  요새 활동이 좀 뜸하다 싶었는데..
  오래간만에 접한 칼럼에서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맞닿아 있는 부분들이 많아서 글을 옮겨놓았다..

# 사랑에 관한 그 흔한 말들을 다시 반복하지 않더라도..
  지나간 추억과 현재를 비교하며, 현재의 소중한 인연까지 놓쳐버리는 실수를 범하지는 말자..

  후에 내가 더 많이 상처받고, 상대방에게 더 많이 준 것에 대해 아파할지라도,
  지금의 내 감정에 솔직해지고 당당해지자..

  적어도 후회나 미련은 남지 않았으니까..
  최선을 다하고도 어쩔 수 없는 건,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 더 이상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것!!
   이러다 실버타운 직행열차 티켓을 끊을지도 모를 일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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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공자'의 만남, 왜 좌절됐나?

2010/02/15 19:27
'예수'와 '공자'의 만남, 왜 좌절됐나?

[망국 100년] 서학을 통한 동서양의 만남

기사입력 2010-02-12 오전 7:34:41 /김기협 역사학자

베네치아
사람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말 원나라 치하의 중국에 20여 년간 머무르면서 관찰한 내용을 <동방견문록>에 적었다. 당나라 때나 원나라 때처럼 중국이 개방적인 시기는 말할 것 없고, 다른 시기에도 중국을 다녀간 사람이 꽤 있었겠지만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폴로처럼 오랫동안 체류하고 조정에 가까이 있던 사람에 관한 자료도 중국 측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동서 간 접촉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16세기까지의 접촉이 단편적인 것이었다는 데 있다. 폴로의 책은 잘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는데도 그가 말한 '카테이(Cathay)'가 중국을 가리킨 것이라는 사실조차 300년 뒤에야 확인될 정도로 중국과 유럽 사이의 접촉은 엉성한 상태에 있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인도양 항로를 장악한 뒤 남중국해까지 진출하면서 중국과 지속적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1517년에 광저우에서 교역을 시작하고 1557년에는 마카오임대해 항구적 기지를 만들었다.

마카오를 거점으로 한 포르투갈 인의 교역 활동은 중국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았다. 비단과 도자기 등 중국 상품이 수출된 반면 중국에는 유럽 상품의 수요가 없어서 종래 이슬람 상인들이 중국으로 가져오던 인근 지역의 상품을 대신 가져오는 정도였다. 중국 측에서 포르투갈 인을 조공 대상인 오랑캐의 하나로 여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6세기 말까지 경제적 관계가 아직 크게 자라나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진 문화 교류 현상이 일어난 것은 가톨릭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해서였다. 중국에서는 유럽에서 유래한 지식과 사상을 중심으로 '서학(西學)'이 일어나고 유럽에서는 미지의 문명을 흠모하는 '중국 바람(Chinoiserie)'이 일어났다. 학식과 조직력을 아울러 갖춘 선교사들이 효과적인 매체 역할을 맡은 덕분이었다.

16세기 초의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정신적으로는 영적 권위가 손상되고 물질적으로는 교회의 영향에서 많은 지역이 벗어났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광범위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6세기 중엽의 이 움직임에는 '반동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과 '가톨릭 종교개혁(Catholic Reformation)'이라는 두 가지 이름이 붙었는데,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진 움직임이었다. 종교재판 강화 등 반동적 측면도 한편에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마르틴 루터의 문제 제기를 대부분 받아들이는 듯한 개혁적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개혁적 측면을 대표하는 주체의 하나가 예수회였다. 1534년 7인의 창시자가 파리에서 결성한 예수회는 1540년 교황으로부터 헌장 인가를 받은 후 새로운 종교 사업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가장 중요한 사업 분야가 교육과 해외 선교였다. 변화가 빨라지는 시대 상황 속에서 교회의 권위를 유럽인의 마음속에 지키는 것이 교육 사업의 목적이었고, 유럽에서 상실한 가톨릭교회의 세력을 항해 활동을 통해 넓어진 새로운 세계에서 만회한다는 것이 선교 사업의 목적이었다.

예수회의 선교 노선에는 기존의 기독교 선교와 다른 점이 있었다. 전통적 선교 노선은 개인의 구원에 목적이 집중된 것이었다. 한 사람씩 붙잡고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설득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예수회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선교 대상으로 잡았다. 개인이 자기 사회를 이탈해서 기독교로 건너오게 하는 것보다 사회 전체가 기독교에 접근해 오도록 하는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런 입장에서 '적응주의(accommodationism)'라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새로운 선교 노선이 개발되었다.

적응주의 노선 형성에 가장 큰 역할을 맡은 것이 프란시스코 사비에르(1506~1552)였다. 예수회 창시자의 한 사람인 사비에르는 1542년 인도의 고아에 도착한 이후 중국 광둥성 해안 밖의 섬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아시아 선교 사업의 길을 열었다. 1619년 시성되어 "모든 선교 사업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사비에르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549년 8월부터 2년 남짓 일본에 체류하기도 했고, 죽기 전에는 중국에 들어갈 길을 찾고 있었다. 수준 높은 문명과 거대한 정치 조직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개인의 개종으로는 선교의 효과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적응주의 노선을 구상한 것이다. 선교 대상 사회의 관습을 최대한 존중해서, 기독교 신앙에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만 아니라면 개종자에게 관습을 버리도록 요구하지 않음은 물론, 선교사 자신이 그 관습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이 노선이 일으킨 신학적 문제가 '은총 논쟁'에 나타난다. 미카엘 바이우스(1513~89)와 코르넬리우스 얀센(1585~1638) 등은 엄격한 기준의 '충족 은총(gratia sufficiens)'을 주장했는데, 루이스 데 몰리나(1535~1600)와 프란시스코 수아레스(1548~1617) 등 예수회 신학자들은 '효능 은총(gratia efficax)'으로 이에 맞섰다. 쉽게 말해서 공자와 맹자가 지옥에 있으리라는 것이 충족 은총의 관점이고 천당에 있으리라는 것이 효능 은총의 관점이었다.

사비에르는 아시아 선교 사업의 궁극적 무대를 중국으로 보았고, 그 후계자들은 이를 이어받아 중국 선교를 지상 과제로 삼았다. 사비에르가 죽은 몇 년 후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항구적 거점을 가지게 되자 그곳은 중국 진출을 위한 선교사들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1582년에야 두 명 선교사의 내지 일시 체류가 허용되었고, 그 이듬해부터 항구적인 선교소가 중국 안에 설치되었다.

1583년 말 동료 선교사 한 사람과 함께 중국 땅을 밟은 마테오 리치(1552~1610)가 교회 입장에서 보면 중국 선교사의 개척자였고,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과 동아시아 문명 간 접촉의 수준을 일거에 끌어올린 거인이었다. 17년의 활동 기간 중 유럽 문명을 중국인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책, 이른바 서학서(西學書) 여러 편이 그의 손에서 나왔고, 그 사업을 자기 후계자들이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리치는 중국을 면밀히 관찰해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서라도 지배 계층을 포섭하는 것이 궁극적 성공을 바라볼 길이라는 전략을 세웠다. 종래의 선교에서는 사회의 소외 계층이 손쉬운 선교 대상이었는데, 리치는 사회 주류를 선교 대상으로 잡은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진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기보다 기독교와 맺어진 유럽 문명의 훌륭한 점이 중국 지식층의 인정을 받게 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중국인이 중시하는 역법(曆法) 운영에 유럽의 기하학과 관측 기술이 유리한 점을 간파하고 그 방면 기술 도입에 역점을 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 결과 몇 십 년 후 청나라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에 유럽 기술이 대거 채택되고 예수회 선교사들이 그 운영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17세기 초 상황에서 유럽 학술 수준이 중국보다 전체적으로 높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야에 따라 앞선 영역이 있었다. 이런 영역을 리치 등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소개했는데, 그 내용에 대개의 중국 지식인들은 지엽적인 가치만을 인정했다. 18세기 말 <사고전서>를 편찬할 때 서학서를 총괄한 해설이 이런 관점을 보여준다.

살피건대 구라파인들의 천문추산(天文推算)이 치밀한 것과 공장제작(工匠製作)이 정교한 것은 실로 옛 제도를 넘어선다. 그 의론이 과사(誇詐)하고 우괴(迂怪)함 또한 이단 가운데 두드러진다. 국조(國朝)에서는 그 기능은 취하되 그 학술은 전하는 것을 금하였으니, 구존(具存)의 깊은 뜻이다.

그 책들은 원래 책부(冊府)의 편(編)에 올릴 만한 것이 못되지만, <환유전(有詮)> 같은 것들은 <명사> '예문지' 속에 이미 그 이름이 올라 있어, 빼어버리고 논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미혹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드러나게 올려놓고 비판하는 것이다. 또 <명사>에는 이 책들이 도가(道家)의 것으로 실려 있는데, 이제 그 내용을 보면 3교(敎)의 이(理)를 아울러 표절하였고 또 3교(敎)를 싸잡아 배척하였다. 변환(變幻)하고 지리(支離)하여 따질 수도 없게 만든 것이 참으로 잡학(雜學)이로다. 따라서 잡가(雜家) 속에 그 존목(存目)을 둔다.


▲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의 만남을 넘어서는 동서 간의 깊은 접촉은 그 후 200년간 다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뒤집어 보는 시각을 프랑스의 자크 제르네 교수가 1982년 제기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리치가 서광계를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기보다 서광계가 리치를 유교도로 개종시켰다는 것이다. 양면성이 있는 일이겠지만, 제르네 교수의 시각이 역사적 함의가 더 큰 것임은 분명하다. ⓒ프레시안
그런데 당시 중국의 최고 지식인들 중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열렬히 호응한 사람들이 있었다. <기하원본> 번역까지 맡을 만큼 깊이 개입한 서광계(徐光啓)는 재상급인 내각대학사의 지위에 오른 거물이었다. 교회사가들은 이것이 기독교 내지 유럽 문명의 우월성을 보여준 증거라고 환호해 왔지만, 근래의 치밀한 연구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명나라 말기의 위기 의식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노력의 한 갈래였으며, 유교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요소를 서학에서 찾으려는 보유론(補儒論)의 입장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유교가 원래는 대단히 훌륭한 사상이었는데,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타락한 상태에 빠져 있으며, 이것을 원래의 훌륭한 상태로 되돌려놓는 데 기독교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마테오 리치 선교 노선의 핵심인 보유론이었다. 중국에서는 사상의 혁신을 꾀할 때 "공자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적 간판을 내놓는 경향이 있는데, 리치는 여기에 편승하려 한 것이었다.

적응주의가 원래 선교 대상 사회의 관습과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이거니와, 보유론은 그중에서도 극단으로 간 것이었다. 리치가 죽은 후 이 노선이 기독교의 본질을 저버린 것이라는 항의가 가톨릭교회 내에서 일어나 '전례 논쟁(Rites Controversy)'이라는 교리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1630년대에 시작되어 18세기 초에야 마무리된 이 논쟁에서 예수회의 적응주의 노선이 패퇴한 결과 서학서의 사상 관계 내용 중 중요한 것들이 교황청에 의해 부정되었고 중국 선교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문명의 소개 자료로서 서학서의 가치는 19세기 초까지도 동아시아 사회에서 유지되었다. 이익과 정약용 등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도 서학서를 통해 서양의 존재를 인식했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이 만든 서학서는 17세기 초반의 시점에서 동서 문명의 대단히 수준 높은 접점이었다. 그러나 두 문명의 융화를 간절히 바라는 제작자들의 의도가 당시 유럽인의 일반적 태도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양인들이 서양을 바라보는 통로로서 한계를 가진 것이었다. 이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정조 때의 서학 운동이었다.

정약용을 비롯한 일군의 지식인들은 서학서의 많은 내용에 감명을 받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보유론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이 그룹의 한 사람인 이승훈이 1783~4년 북경에 가서 선교사를 찾아가 보니 보유론은 이미 폐기된 지 오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서학을 기능적 차원 내지 학술 사상의 차원에서 고려하던 사람들은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고, 일부만이 신앙 운동으로서 서학을 지켜나가게 되었다.

19세기 초반 유럽인의 힘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 서양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회의 서학서 다음 단계를 맡을 통로는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개신교 선교사들의 손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란가쿠(蘭學)'를 전개한 일본의 경우와 대비가 된다. 란가쿠의 실제 내용에 별것 없었다는 평가절하도 있지만, 일본인의 자발적 관심을 보여준 현상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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