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염종석 `공 하나에 자존심을 건다'

(서울=연합뉴스) 진규수 기자 = " 이제는 마지막이다. 보직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

통산 93승을 올린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베테랑 투수 염종석(35)은 아직 불펜 투수가 익숙하지 않다.

부상으로 인해 올해 개막 로스터에 들지 못한 뒤 2군에서 와신상담한 염종석은 지난 6월19일 올 시즌 처음 1군에 등록, 중간계투로 4경기에 나섰다.

1992년 17승을 거두고 혜성처럼 나타난 뒤 16년간 롯데 마운드를 지켜오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염종석이었지만 올해는 순탄치가 않았다.

7승만을 남겨둔 통산 100승에 대한 욕심도 컸고 올해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전지훈련에 임했지만 훈련 도중 고관절 부상을 입고 조기 귀국하면서 일이 꼬였다.

새로 부임한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염종석을 배려하지 않고 투수진을 구성했고 가뜩이나 1군과 2군 사이의 교류가 없던 롯데는 5선발 로테이션이 유례없이 탄탄히 돌아가면서 승승장구 연승 행진을 벌였다.

5월 중순 로이스터 감독은 그에게 2군에서 불펜 투수로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2군에서 불펜 투수로 한 달을 연습한 뒤에야 1군에서 기회를 줬다.

17년 만에 처음 받아드는 보직인 중간계투는 아직 얼떨떨하다. 급하게 몸을 풀어 1~2이닝을 전력투구해야 하는 패턴도 익숙하지 않고, 이대로라면 통산 100승은 커녕 언제 은퇴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조급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염종석은 " 4월 말까지만 해도 선발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며 "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내년 기약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계투든 패전처리든 투수 염종석을 판단해주길 바란다는 마음에 올라왔다 " 고 말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성적은 좋다. 4경기에 나와 모두 7이닝을 던져 무실점으로 막았고, 로이스터 감독 역시 염종석의 구위에 대해 흡족한 평가를 내렸다.

염종석은 롯데가 마지막으로 우승하던 1992년 멤버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선수. 당시 고졸 신인으로 완벽한 주연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염종석은 이제는 스스로를 `조연'으로 낮춘다.

그는 " 모든 공 하나 하나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던진다 " 며 " 언제까지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일 2군으로 내려가면 오늘 기록이 투수 염종석의 마지막 기록이 될 수도 있기 때문 " 고 담담하게 말했다.

nicemasaru@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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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비운의' 역대 롯데 에이스들
[OSEN=이상학 객원기자] 지난 22일 주형광이 31살의 나이로 은퇴하자 롯데를 이끌었던 과거의 에이스들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리 유쾌하지 못한 기억이 더 많다. 영광의 기억도 훗날에는 상처뿐인 훈장이 되어버렸다. 돋보기로 햇빛의 초점을 맞추면 까맣게 확 타버리는 것처럼 순간은 뜨거웠지만, 어디까지나 잠깐이었다. 불꽃처럼 타올랐지만 남는 것은 검은 재였다. 비교적 롱런한 투수도 그 나름대로 또 애환이 있었다. 그들이 모두 부산 야구 그리고 롯데 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들이었다는 점에서 팬들의 가슴은 더욱 시리다.

▲ 최동원

‘전설’ 최동원은 선동렬과 함께 한국야구에 길이 남을 불멸의 투수로 기억된다. 특히 1984년은 그야말로 ‘최동원의, 최동원에 의한, 최동원을 위한’ 해였다. 그해 51경기에서 14차례 완투 포함해 27승13패6세이브 방어율 2.40, 탈삼진 223개를 기록했다. 다승·탈삼진 1위를 비롯해 페넌트레이스 MVP와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까지 휩쓸었다. 27승은 역대 최다승 부문 2위이며 탈삼진 223개는 역대 1위 기록이다.

무엇보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거두며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끈 장면은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으며 일어나서도 안 될 사건이었다. 선발로만 4차례나 등판하는 등 한국시리즈 5경기에서 4승1패 방어율 1.80을 기록했다. 159타자를 상대해 무려 40이닝을 던졌다. 이는 여전히 한국시리즈 최다 투구이닝으로 남아있다. 한국시리즈 최다 탈삼진(35개)·피안타(32개) 모두 그때 그 최동원이 아니면 감히 범접조차 할 수 없는 흔적들이다. 그해 한국시리즈 MVP로 유두열이 선정된 것은 너무 즉흥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최동원의 통산 성적은 액면으로 볼 때 분명 훌륭하나 위대하지는 못하다. 최동원은 프로 통산 248경기에서 103승74패26세이브를 기록했다. 최동원이 통산 누적기록에서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린 부문은 완투(80회)밖에 없다. 하지만 최동원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뛴 기간이 불과 8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조금 더 오래 뛰었더라면 통산 누적기록 순위도 상당 부분 달라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비율기록에서 최동원은 단연 눈에 띈다. 통산 방어율이 불과 2.46으로 선동렬(1.20) 다음이다. 최동원은 선수생활의 마지막이었던 1990년을 제외한 나머지 7시즌 동안 방어율이 2점대 밑이었다. 그리고 데뷔한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으로 14경기 이상 완투를 하며 200이닝 이상 던졌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최정상이었다. 그러나 살인적인 등판 일정에는 장사도, 고무팔도 없었다. 다리를 힘차게 들어 올리는 역동적인 투구 폼으로 150km 내외의 강속구를 뿌리는 파이어볼러에게 관리는 필수였지만 그 시절에는 관리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1988년부터 내구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최동원은 그 해 11월22일, 뼈를 묻을 것으로 생각한 롯데 유니폼을 강제적으로 벗어야 했다. 안 그래도 구단과 잦은 마찰을 빚었던 최동원은 선수협 결성 및 활동의 주동자로 구단에 밉보인 나머지 초대형 4대3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으로 이적했다. 당시 최동원을 받는 대가로 삼성이 롯데에 내민 카드가 바로 김시진이었다. 최동원은 트레이드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거부를 하다 1989시즌 중에야 삼성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미 예전의 최동원이 아니었다. 삼성에서 2년간 7승을 거두는 데 그치자 과감하게 유니폼을 벗었다. 당시 그의 나이 32살. 선수생명이 길지 않았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너무 이른 나이에 결정한 은퇴였다. 현재 최동원은 한화 2군 감독으로 재임 중이며 롯데와의 관계 회복도 진전된 소식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부산과 롯데팬들은 5년이라는 세월 동안 불꽃처럼 타올라 한국시리즈 4승이라는 신화를 남기고 장렬하게 전사한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 윤학길

윤학길은 롯데를 이끈 투수들 가운데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다. 1986년 롯데에 입단한 윤학길은 1997년 은퇴했다. 은퇴 당시 나이는 36살로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시점이었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랬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은퇴할 때까지 롯데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혹사를 당해 이른 나이에 은퇴하거나 아니면 롯데로부터 버림을 받은 에이스 선후배들의 사정을 볼 때 윤학길은 비교적 평탄하게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고 또 마쳤다. 윤학길은 부산과 롯데의 화끈하고 열정적인 기질과 달리 깔끔한 외모로 귀공자 이미지를 풍겼다. 그래서 황태자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독한 황태자’였다.

부산상고-연세대 그리고 상무를 거쳐 롯데에 입단한 윤학길은 데뷔 첫 해 25경기에서 1승을 올리는 데 그쳤지만, 방어율은 2.76이었다. 이듬해부터 선발진에 진입한 윤학길은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철완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1990년을 제외한 6년간 매년 두 자릿수 승리와 완투경기 그리고 200이닝 이상을 투구했다. 특히 1988년에는 18승을 거두며 다승왕에도 올랐다. 오른손 정통파 투수로서 묵직한 구위를 자랑한 윤학길은 선발등판 때마다 지든, 이기든 한 경기를 확실하게 책임진다는 믿음을 줄 정도로 듬직함 그 자체였다.

프로 통산 12년간 308경기에서 117승94패10세이브를 방어율 3.33을 기록한 윤학길은 완투에 있어서 만큼은 한국프로야구 최고로 남아있다. 무려 100경기에서 완투하며 이 부문 한국프로야구 역대 통산 1위에 올라있다. 통산 231경기에 선발등판했으니 완투율은 무려 43.3%였다. 완투승도 74승으로 역대 1위. 그러나 윤학길은 너무 듬직한 게 문제였다. 팬들에게 어필할 만한 강력한 임팩트를 남기지 못한 것이다. 입단 초에는 최동원, 중고참이 됐을 때에는 박동희·염종석·주형광 등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했다. 활약한 것만큼 주목받지 못한 것도 비운이라면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론 지독하리만큼 뒷받침하지 못하며 26차례의 완투패를 넋놓고 바라본 허약한 롯데 타선도 윤학길에게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롯데 투수코치를 거쳐 현재는 상무 코치를 맡고 있다.

▲ 박동희

롯데는 전통적으로 방망이보다는 마운드로 승부하는 팀이었다. 부산지역에 에이스가 많이 배출된 것이 가장 큰 힘이었다. 최동원의 믿기지 않는 투혼으로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따낸 1984년. 그 즈음 부산지역에서는 최동원의 대를 이을 유망주가 한창 뜨고 있었다. ‘슈퍼 베이비’ 박동희였다. 150km대 강속구를 앞세워 고교타자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며 한껏 주목을 받은 주인공이 바로 부산고 소속의 박동희였던 것이다. 특히 부산고 3학년 시절인 1985년 봉황대기에서는 34이닝 무실점이라는 믿기지 않는 활약으로 부산고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고려대 진학 후에도 부동의 국가대표 에이스로 승승장구하며 ‘제2의 선동렬’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1990년 고려대 졸업 후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기도 했던 박동희는 당시 신인 최고 계약금에 달하는 1억5200만 원에 롯데에 입단했다. 프로 데뷔전이었던 1990년 4월11일 대구 삼성전에서 구원등판, 4이닝 동안 14타자를 상대로 탈삼진 10개를 잡아내며 4이닝 1실점으로 세이브를 기록했다. 신인 데뷔전 최다 탈삼진이었다. 데뷔 첫 해 10승7패7세이브 방어율 3.04로 활약한 박동희는 1991년 14승9패3세이브 방어율 2.47을 기록하며 정상급 투수로 발돋움했다. 1992년 빙그레와의 한국시리즈에서는 2승1세이브를 따내며 당당히 한국시리즈 MVP까지 차지했다. 1994년에는 마무리투수로 변신해 31세이브를 거뒀다. 이는 지금도 롯데 구단 역사상 한 시즌 최다 세이브로 남아있다.

그러나 박동희는 1995년부터 팔꿈치 부상으로 하향세를 걸었다. 프로에서는 입단 첫 2년간 규정이닝을 넘긴 것이 고작인 박동희였지만 고교·대학 시절 꾸준히 축적된 피로가 탈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묵직한 구위가 힘을 잃자 단조로운 구종과 들쭉날쭉한 제구력이라는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불거졌다. 파워피처답지 않게 자신감도 잃어버렸다. 그런 박동희를 롯데는 미련 없이 내보냈다. 1997년 6월 2대2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으로 보낸 것이다. 삼성에서 한때 부활 조짐을 보인 박동희는 그러나 또다시 부상 악재에 시달리며 끝내 재기하지 못한 채 2002년 은퇴했다. 프로 13년 통산 251경기 59승50패58세이브 방어율 3.68.

박동희는 지난 3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떴고, 롯데는 그를 위해 4월10일 홈개막전에서 추모행사를 가졌다. 선수생활 마지막은 삼성이었지만 그래도 부산과 롯데의 선수라는 정서가 강했던 것이다. 여전히 박동희는 롯데 투수, 그러나 기량을 꽃피우지 못한 비운의 투수로 기억된다.

▲ 주형광

최동원-윤학길-박동희. 순서대로라면 주형광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주형광이 맞다. 현역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주형광의 나이 이제 겨우 31살이다. 주형광보다 10살이나 더 많은 ‘최고령’ 송진우(한화)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현대 스포츠의학과 관리시스템의 발달로 40살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주형광은 유니폼을 벗었다. 무려 한 달 넘게 감독 자리가 공석이 되어있는 어수선한 구단 사정에서 등 떠밀리듯 은퇴한 감도 없지 않지만 주형광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부산과 롯데였다.

부산고 시절부터 주형광은 부산야구와 롯데야구를 이끌어나갈 차세대 에이스로 주목받았다. 1994년 롯데 입단 당시 계약금(9200만 원)은 고졸 신인 최고액이었다. 기대대로 주형광은 데뷔 첫 해부터 단숨에 롯데 주축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1994년 롯데의 다승·방어율·탈삼진·승률 1위가 바로 주형광이었다. 게다가 최연소 승리투수(18세1개월18일), 최연소 완투승(18세1개월18일), 최연소 완봉승(18세3개월), 최연소 세이브(18세1개월14일) 등 각종 최연소 기록들을 세웠다. 지난해 ‘괴물’ 류현진(한화)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는 최연소 200탈삼진과 최연소 200이닝-200탈삼진 기록도 주형광이 보유하고 있었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데뷔 첫 7년간 주형광은 77승을 쌓아올렸다. 특히 1996년에는 18승·221탈삼진으로 2관왕에 올랐다. 무엇보다 데뷔 첫 7년간 무려 5시즌이나 180이닝 이상 던졌다. 허리디스크로 의병제대하며 제대로 된 동계훈련도 치르지 못한 1997년에는 선발로 20경기, 마무리로 12경기에 출전하는 등 마구잡이식 등판으로 무리했다.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던지는 주형광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결국 주형광은 마지막 7년간 겨우 10승을 올리는 데 만족해야했다. 선수생활 마지막은 원포인트 릴리프였다. 프로 14년간 통산 성적은 386경기 87승82패9세이브 방어율 3.83.

강속구가 아니라 제구력으로 승부하는 투수였던 만큼 충분히 롱런할 수 있었지만, 성적지상주의가 끝내 발목을 잡고 말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 중 은퇴마저도 거의 최연소 기록을 세우고 만 주형광은 롯데의 일본 코치연수를 제안을 받아들여 내년부터 지도자 수업을 쌓을 계획이다.

▲ 염종석

이제 남은 것은 그밖에 없다. 염종석. 다수의 롯데팬들은 최동원 다음으로 윤학길-박동희를 건너 염종석을 먼저 떠올린다. 1992년 금테안경을 쓴 투수가 따낸 우승이라는 드라마 같은 결실이 흡사 1984년 최동원의 투혼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염종석은 1984년 당시 최동원보다도 훨씬 어린 투수였다. 최동원마저 감당하기 쉽지 않았던 투혼이라는 무게의 짐은 어쩌면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로 직행한 19살 짜리 고졸신인 투수에게는 너무 막대한 짐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1992년 롯데 마운드에는 윤학길과 박동희가 있었지만 페넌트레이스 때부터 축적된 피로는 쌓이고 쌓여 이미 넘쳐흐른 상태였다.

1992년 부산고를 졸업하고 프로에 데뷔한 염종석은 그해 35경기에서 17승9패6세이브 방어율 2.33을 기록했다. 방어율 1위에다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와 신인왕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명백한 혹사였다. 염종석은 무려 204⅔이닝을 소화했다. 물론 등판 간격만 철저하게 지켜졌다면 크게 문제될 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해 염종석이 등판한 35경기 중에는 구원으로 등판한 13경기가 포함돼 있었다. 게다가 선발로 등판한 22경기 중 무려 13경기에서 완투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염종석은 6경기에 등판, 30⅔이닝을 던졌다. 구원등판도 3경기나 있었다. 그러나 입단 전부터 팔꿈치가 좋지 않았으며 145km 내외의 빠른 직구와 슬라이더를 무기로 삼은 19살 염종석에게는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1992년은 염종석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전성기가 되고 말았다. 염종석은 2년차였던 1993년 10승을 따낸 것을 끝으로 단 한 시즌도 두 자릿수 승리를 올리지 못했다. 1995년(2.98) 이후 2점대 방어율도 먼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1992년을 비롯해 7시즌을 규정이닝을 넘겼으나 예전의 이닝이터 면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염종석의 완투경기는 9년째 나오지 않고 있다. 팔꿈치 수술만 두 차례나 하며 오랜 재활과정을 거친 염종석은 더 이상 예전처럼 묵직한 직구를,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던지지 못했다. 최동원은 5년 가까이 불꽃을 태웠지만 염종석은 채 2년도 되지 않았다.

이 같은 갖은 곡절에도 불구하고, 15년간 프로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것은 그래서 염종석에게 더욱 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프로 통산 335경기 93승132패14세이브 방어율 3.76. 아직 염종석의 선수생활은 끝나지 않았고, 부산과 롯데팬들은 그의 통산 100승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최동원-윤학길-박동희-주형광-염종석.

<2007 삼성 PAVV 프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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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종석은 과연 '비운의 투수'인가

2007/05/28 09:16
염종석은 과연 '비운의 투수'인가
[스포츠2.0 2007-05-25 14:36]    
1992년 신인왕 염종석.(사진 제공=롯데 자이언츠)

롯데 염종석(34)은 5월 10일 현재 방어율 순위 3위(1.64)에 올라 있다. 선발 등판 5회에 경기당 평균 6.6이닝 투구는 더 인상적이다. 경기당 투구수는 99개. 염종석은 올해 자신의 투구수를 거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자랑스러워 할만하다. 지난해에는 선발 등판 평균 5.1이닝에 77구를 던졌다.

염종석은 5선발로 올시즌을 시작했다. 시즌 전 롯데 이상구 단장은 염종석에게 “7,8승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동료 최향남은 “지금 우리 팀의 에이스는 염종석”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염종석이 돌아왔다”고들 한다. 물론 1992년, 무려 15년 전 기억에서의 귀환이다.

그해 부산고를 갓 졸업한 신인 염종석은 롯데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 염종석에게는 ‘비운의 투수’라는 호칭이 붙었다. 마지막으로 10승을 한 시즌은 1993년. 잇따른 수술과 재활. 선발 5이닝을 눈물겹게 던지는 투수가 염종석이었다.

그러나 염종석은 과연 비운의 투수일 뿐일까. 염종석은 올해로 프로 데뷔 15년째를 맞았다. 현역 투수 가운데 그보다 더 오래 프로생활을 한 선수는 가득염, 김원형, 조웅천(이상 SK), 송진우(한화), 이상목(롯데)뿐이다. 이 점만으로 보면 염종석은 행복한 투수다.

5월 10일 인천 SK전을 앞두고 선수단 숙소에서 만난 염종석에게 물었다. "‘비운의 투수’라는 호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는 씩 웃으며 “한국 사람들이 정이 많기 때문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오해 1 - 염종석은 2년째부터 혹사로 무너졌다

염종석은 1992년 17승9패6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리고 2.33의 기록으로 무려 8년 만에 방어율 왕관에 선동열이 아닌 다른 투수의 이름을 새겼다.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그의 차지였다. 이듬해 염종석의 성적은 10승10패7세이브 방어율 3.41로 떨어졌고 그 뒤로는 한 번도 10승 투수가 되지 못했다.

데뷔 시즌에 염종석은 204⅔이닝을 던졌다. 고졸 신인에게 많은 이닝이다. 선발 22회, 구원 13회 등판이라는 마구잡이 기용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그러나 염종석은 한순간에 사라진 게 아니다. 그는 1995년까지 꾸준한 활약을 했다.

염종석은 1993년 158⅓이닝을 던졌다. 적은 이닝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1992년의 빛에 가려서 그렇지 ‘2년생 징크스’를 딛고 거둔 10승7세이브는 대단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해에는 재계약 협상 진통으로 스프링캠프에 늦게 합류해 훈련량이 많지 않았다. ‘훈련 벌레’로 알려진 염종석은 “그해가 가장 훈련량이 적었던 시즌”이라고 말한다.

염종석은 1994, 1995년에 각각 102⅓, 127이닝을 던지는 데 그쳤다. 혹사의 여파가 아니라 병역 의무 때문이었다. 염종석은 1994년 2월 방위병이 돼 1995년 8월 소집해제됐다. 당시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방위병으로 근무하며 홈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리그 평균 기록이 3.71이던 1995년 염종석의 방어율은 2.98이었다.

어쩌면 병역과 선수생활을 함께 한 힘든 시즌이 부상을 불렀는지도 모른다. 삼성 박충식이 조로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1995~1996년 방위병 시절 적은 훈련량’이 꼽힌다.

오해 2 - 팔꿈치 부상은 혹사의 결과다

염종석은 1992년 시즌을 마친 뒤 <주간야구>에 자신의 팔꿈치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세월이 오래 흐른 탓에 그 인터뷰를 기억하는 이들은 드물다. 당시 인터뷰에서 염종석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오른 팔꿈치를 다쳤다”고 말했다. 롯데 입단 당시에는 수술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구단 관계자는 “투수 혹사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구단 안에서 염종석의 팔꿈치가 혹사 때문에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는 드물다”고 말했다.

물론 신인 때 200이닝이 넘는 투구는 팔꿈치에 나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LG 김용수 투수 코치는 “투수의 어깨는 분필과 같다. 서서히 닳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적어도 1995년 시즌 중반까지 염종석의 팔꿈치는 닳지 않았다.

염종석이 처음 팔꿈치 수술을 한 때는 1995년 12월이다. 그의 수술 경력은 모두 세 번. 두 번째는 어렸을 때 화상을 입은 오른쪽 어깨에 피부를 이식하는 수술이었다. 1997년의 일이다. 세 번째 수술은 팔꿈치 통증이 재발한 1999년 12월에 했다. 염종석은 이때 수술 이유를 “여유 있게 재활을 하지 못하고 무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해 3 - 염종석의 슬라이더는 갑자기 사라졌다

1992년 그의 슬라이더는 선동열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웬만한 직구와 맞먹는 스피드로 날카롭게 꺾였다. 각도만큼이나 컨트롤도 완벽했다. 1992년의 기록과 이후 기록을 비교해 본 이들은 ‘그 슬라이더는 왜 갑자기 사라졌는가’라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염종석의 슬라이더는 1993년에 사라진 게 아니다. 염종석은 “1995년까지 구위는 신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염종석의 오른쪽 어깨와 팔꿈치에는 힘들었던 15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사진 김병준)

염종석이 자신의 슬라이더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는 1997년이다. 염종석은 1995년 연말에 수술을 받고 지루한 재활기간을 거쳤다. 염종석은 재활 뒤 등판에서 전만큼 팔을 자신 있게 뻗지 못한고 있음을 느꼈다. 슬라이더의 각도가 밋밋해졌고 마음 먹은 곳에 꽂히지도 않았다. 부상의 공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피드는 떨어지지 않았다. 변화구 투수로 변신한 요즘도 슬라이더는 염종석이 가장 자신 있게 던지는 공이다.

‘선동열급 슬라이더’를 갖고 있던 염종석은 왜 선동열만큼의 활약을 딱 한 시즌만 보였을까. 이유는 아마 염종석이 1995년까지 자신의 표현대로 “직구와 슬라이더 딱 두 개 구종만 던지는” 투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동열도 직구와 슬라이더에 의존했지만 직구의 질이 달랐다. 염종석은 1992년 자신의 직구 스피드가 시속 144~145km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선동열의 공은 그보다 더 빨랐고 질도 좋았다.

신화를 벗긴 뒤

염종석에게 비극의 음울한 배경 음악을 걷어낸다면 무엇이 남을까. SK 전력분석팀의 김정준 과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투구는 강약의 두 요소를 갖고 있다. 올해 염종석은 약을 활용하는 방법을 깨우친 것 같다. 한화 문동환이 재기한 길이다.” 메이저리그 363승 투수 워렌 스판은 “타격은 타이밍, 투구는 타이밍 빼앗기”라는 명언을 남겼다. 강속구도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을 수 있지만 느린 공으로도 얼마든지 타자의 타이밍을 교란할 수 있다.

지난 날 직구-슬라이더 투수였던 염종석은 올해 성공적으로 기교파 투수로 변신하고 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염종석은 힘에 의존하는 투수였다. 포심패스트볼 구사율은 70%가 넘었다. 그러나 첫 수술 뒤에 투심패스트볼, 즉 싱커를 익혔다. 살짝 떨어지는 싱커는 스피드보다는 볼 끝의 움직임이 중요한 구종이다.

2000년대 이후에는 포크볼을 익혔다. 과거 옆으로 날카롭게 휘는 슬라이더는 각은 무뎌졌지만 좀 더 종적으로 변했다. 모두가 떨어지는 구종이다. 올해는 느린 커브가 좋아졌다. 지난해에도 간간히 던지긴 했지만 올해는 컨트롤이 더 좋아졌다. 여기에 와인드업 때 왼쪽 다리를 치켜 올렸다 잠깐 멈춘다. ‘이중 투구’라는 항의를 받지 않을 만큼의 짧은 시간이지만 이 때문에 타자들은 타이밍을 빼앗긴다.

투수 출신인 김과장은 1992년 LG에 선수로 입단한 뒤 1997년부터 전력분석요원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투수들을 관찰했다. 그는 염종석의 변화를 “힘에서 떨어짐, 떨어짐에서 다시 약함”으로 요약했다.

염종석은 아직도 “파워 피처들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 그가 그랬다. “지금 내 공은 공도 아니다”고 멋쩍게 웃는다. 그러나 그 공으로 염종석은 올시즌 롯데의 돌풍을 이끌고 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도 하다.

“대략 2000년부터 내가 파워 피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때 이후 힘에 의존하는 피칭을 버렸다”는 게 염종석의 말이다. 힘을 앞세우는 투수가 기교파로 변신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염종석은 부상 후유증까지 갖고 있다. 변신 과정은 힘들었을 것이다. 느린 커브의 위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까지 몇 년이 걸린 셈이다.

염종석은 비운의 사나이인지도 모른다. 데뷔 시즌의 혹사는 당장은 아니었지만 그 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운의 투수 염종석’이라는 말은 그를 15년 전 기억 속에 가둬두는 굴레일 수도 있다.

2007년 현재 염종석의 눈은 미래를 바라본다. 그는 롯데에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훈련하는 투수다. 시즌 초반의 기록은 믿을 게 못 된다. 투수는 기복이 있고 염종석은 지난해까지 비교적 기복이 심한 투수였다. 올시즌 초반의 성과를 얻기까지 그는 많은 땀을 흘렸다. 과거는 오래 전에 잊어버렸다.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는 가장이기도 하다. 가장은 언제나 현실적이어야 한다.

염종석은 올해 호투 이유에 대해 "좋아하던 튀긴 음식을 줄인 덕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투수의 장수 비결'로 '프라이 요리를 먹지 말 것'을 든 사람이 있었다. 50대까지 현역으로 뛰었다는 전설적인 흑인 투수 새철 페이지다.

SPORTS2.0 제 51호(발행일 05월 14일) 기사

인천=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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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옹 오늘도 호투하셨다!!
완전 회춘하신듯..ㅎㅎ

꾸준한 러닝이 효과를 보는 것인가?? ;;
염옹이 롯데 선수들 가운데에서도 항상 꾸준하게 러닝 최고로 많이 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인터뷰 내용처럼, 작년까지만 해도 항상 엇박자이거나, 아니면 5이닝 넘기기 힘들었었는데,
올해 완벽하게 부활하셨으니,
꼭 10승 달성하시고, FA계약 맺었던 것 화끈하게 달성해 버리시길 바랍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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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승' 롯데 염종석 "올해 꼭 10승 달성하겠다"
[마이데일리 2007-05-24 17:06]    
[마이데일리 = 이정호 기자] 롯데 염종석(34)이 13시즌만에 두자리 승수 달성을 노린다.

염종석은 24일 광주 KIA전에서 선발로 나서 7⅔이닝을 4안타 1볼넷 1실점으로 깔끔하게 틀어막는 역투로 치열한 순위싸움 한가운데에 놓인 팀에 귀중한 연승을 안겼다.

4회초 선두 김원섭과 이용규에게 각각 중전안타와 볼넷을 내줘 1실점하는 위기에서 20개의 공을 던진 것을 제외하면 흠잡을 데 없는 내용의 피칭이었다.

삼진은 1개에 불과했지만 안정된 제구와 최고구속 141km의 직구와 커브, 슬라이더 등을 앞세워 베테랑다운 피칭을 선보이면서 KIA 타선을 무력화 시켰다.

최근 3연패서 탈출하면서 시즌 4승(3패) 달성에 성공한 염종석은 1992년 데뷔 첫해 17승, 1993년 10승 이후 13시즌만에 두자리 승수 도전에 청신호를 밝혔다.

염종석은 경기 뒤 "팀이 최근 4연패를 당한 상황이라 연승을 내심 생각하고 이겨야 겠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나섰다. 평소 변화구 위주로 공을 던졌는데 오늘은 초반에는 직구, 후반에 변화구로 패턴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벌써 4승을 거둔 염종석은 올시즌 10승 도전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염종석은 "매년 4, 5승을 거뒀는데 벌써 다 올린 것 같다"고 웃으면서 "물론 (10승에)욕심이 있다. 전에는 잘 던졌을 때 타자들이 안 맞는 등 엇박자가 많이 났다. 올시즌에는 타자들이 많이 도와줘 충분히 10승이 가능할 것이다"고 10승 달성에 욕심을 내비쳤다.

[13시즌만에 10승에 도전하는 롯데 염종석. 사진 = 마이데일리DB]

(광주=이정호 기자 hesed@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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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롯데 팬이지만, 염종석 선수는 참 많이 아쉽다.
92년도 롯데 어린이 야구단 회원으로서 그 때 롯데 우승 당시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당시 신인으로서 롯데 우승을 이끈 염종석 선수.
그 당시의 슬라이더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이후 계속된 부상..
그리고 강병철 감독에게는 아직도 혹사 논란이 따라다니게 만든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염종석 선수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프랜차이스 스타로서
꿋꿋하게 그 자리를 그대로 지켜왔던 그다.

그래서 작년에 롯데가 염종석 선수와 계약 미루고 있을 떄
모든 팬들이 화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저 어깨 사진을 보면서, 참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아무튼..어제 7:0 승리에서 8회 무사사구 무실점 완벽에 가까운 투구 내용을 보인 염종석 선수.
올시즌 완벽하게 부활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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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다음 게시판


아루스란님 :
염종석..그의 어깨와 그의 집념에 박수를 보냅니다.. [10]
번호 57212I 2007.04.15 추천 7I 조회 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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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종석..

그의 어깨 사진과 함께..

 

1992년 당시 신인으로 17승을 거두고 최고수준의 슬라이더를 통해 화려하게 대뷔했던 분..

만년해태팬이지만 스트라이크존에 빨려들어가는 강속구에 즐거워하고 통쾌하게 때려내는

홈런 한방에 즐거워했던 저에게는 ..   그때 상기 염종석선수는 만화에 나왔던 "마동탁" 과 같은

포스를 보였던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와..잘한다.."

그런 그가 그 이듬해부터 혹사란 단어와 함께 사라지기 시작할때 가슴 아팠습니다.


어느덧 저도 커가면서 야구광이라는 딱지는 떼어가고 그냥 군대시절엔 아침 스포츠신문에

나오는 스포츠면 기사만 보고, 메이저리그 경기 가끔 한번씩 보고, 요새는 일이 거의 끝나가는

새벽 무렵에 인터넷 스포츠면이나 한번씩 훑어보며 "염종석"이라는 세 글자는 조금씩 잊혀져 갔습니다.


얼마전 "염종석의 어깨" 사진기사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너무나 마음 아팠습니다.

의업에 종사하는 제가 봤을때 그분의 등과 팔의 상처는 최소 5번의 수술을 거친듯했고

그냥 상처가 회복된것도 아니고 어떠한 이유로(상처회복도 되기 전에 무리한 운동. 또는 감염)등으로

너무나 흉하게 그의 몸에 남았더군요..

그런 그가 오늘 다시 스포츠면 1면기사에 나오니 마치 저의 일인것처럼 가슴아프고 기쁘네요.

얼마전 이대진 선수와 더불어 정말 감동입니다.

92년 당시 일간스포츠지들 1면기사를 여러번 장식했던 분인데.. 다시 한번 당신의 이름을

1면기사에서 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힘내십시오..

당신과 같은 프로야구선수분들 덕분에 스포츠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당신의 노력을 보며

저 또한 인생의 선배분에게 삶을 하나 배웁니다..


힘내세요...어릴때 조그만 시골방 TV를 통해 당신의 상대였던 해태를 응원하면서도

당신의 볼끝 하나에 전율을 느꼈던 한 팬이였습니다..


p.s 오늘 기아의 역전승 정말 간만에 봅니다..오늘은 제 어린시절로 잠시 돌아간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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