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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신인왕 염종석.(사진 제공=롯데 자이언츠) |
롯데 염종석(34)은 5월 10일 현재 방어율 순위 3위(1.64)에 올라 있다. 선발 등판 5회에 경기당 평균 6.6이닝 투구는 더 인상적이다. 경기당 투구수는 99개.
염종석은 올해 자신의 투구수를 거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자랑스러워 할만하다. 지난해에는 선발 등판 평균 5.1이닝에 77구를 던졌다.
염종석은 5선발로 올시즌을 시작했다. 시즌 전 롯데 이상구 단장은 염종석에게 “7,8승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동료 최향남은 “지금 우리 팀의 에이스는 염종석”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염종석이 돌아왔다”고들 한다. 물론 1992년, 무려 15년 전 기억에서의 귀환이다.
그해 부산고를 갓 졸업한 신인 염종석은 롯데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 염종석에게는 ‘비운의 투수’라는 호칭이 붙었다. 마지막으로 10승을 한 시즌은 1993년. 잇따른 수술과 재활. 선발 5이닝을 눈물겹게 던지는 투수가 염종석이었다.
그러나 염종석은 과연 비운의 투수일 뿐일까. 염종석은 올해로 프로 데뷔 15년째를 맞았다. 현역 투수 가운데 그보다 더 오래 프로생활을 한 선수는 가득염, 김원형, 조웅천(이상 SK), 송진우(한화), 이상목(롯데)뿐이다. 이 점만으로 보면 염종석은 행복한 투수다.
5월 10일 인천 SK전을 앞두고 선수단 숙소에서 만난 염종석에게 물었다. "‘비운의 투수’라는 호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는 씩 웃으며 “한국 사람들이 정이 많기 때문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오해 1 - 염종석은 2년째부터 혹사로 무너졌다
염종석은 1992년 17승9패6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리고 2.33의 기록으로 무려 8년 만에 방어율 왕관에 선동열이 아닌 다른 투수의 이름을 새겼다.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그의 차지였다. 이듬해 염종석의 성적은 10승10패7세이브 방어율 3.41로 떨어졌고 그 뒤로는 한 번도 10승 투수가 되지 못했다.
데뷔 시즌에 염종석은 204⅔이닝을 던졌다. 고졸 신인에게 많은 이닝이다. 선발 22회, 구원 13회 등판이라는 마구잡이 기용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그러나 염종석은 한순간에 사라진 게 아니다. 그는 1995년까지 꾸준한 활약을 했다.
염종석은 1993년 158⅓이닝을 던졌다. 적은 이닝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1992년의 빛에 가려서 그렇지 ‘2년생 징크스’를 딛고 거둔 10승7세이브는 대단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해에는 재계약 협상 진통으로 스프링캠프에 늦게 합류해 훈련량이 많지 않았다. ‘훈련 벌레’로 알려진 염종석은 “그해가 가장 훈련량이 적었던 시즌”이라고 말한다.
염종석은 1994, 1995년에 각각 102⅓, 127이닝을 던지는 데 그쳤다. 혹사의 여파가 아니라 병역 의무 때문이었다. 염종석은 1994년 2월 방위병이 돼 1995년 8월 소집해제됐다. 당시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방위병으로 근무하며 홈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리그 평균 기록이 3.71이던 1995년 염종석의 방어율은 2.98이었다.
어쩌면 병역과 선수생활을 함께 한 힘든 시즌이 부상을 불렀는지도 모른다. 삼성 박충식이 조로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1995~1996년 방위병 시절 적은 훈련량’이 꼽힌다.
오해 2 - 팔꿈치 부상은 혹사의 결과다
염종석은 1992년 시즌을 마친 뒤 <주간야구>에 자신의 팔꿈치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세월이 오래 흐른 탓에 그 인터뷰를 기억하는 이들은 드물다. 당시 인터뷰에서 염종석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오른 팔꿈치를 다쳤다”고 말했다. 롯데 입단 당시에는 수술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구단 관계자는 “투수 혹사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구단 안에서 염종석의 팔꿈치가 혹사 때문에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는 드물다”고 말했다.
물론 신인 때 200이닝이 넘는 투구는 팔꿈치에 나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LG 김용수 투수 코치는 “투수의 어깨는 분필과 같다. 서서히 닳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적어도 1995년 시즌 중반까지 염종석의 팔꿈치는 닳지 않았다.
염종석이 처음 팔꿈치 수술을 한 때는 1995년 12월이다. 그의 수술 경력은 모두 세 번. 두 번째는 어렸을 때 화상을 입은 오른쪽 어깨에 피부를 이식하는 수술이었다. 1997년의 일이다. 세 번째 수술은 팔꿈치 통증이 재발한 1999년 12월에 했다. 염종석은 이때 수술 이유를 “여유 있게 재활을 하지 못하고 무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해 3 - 염종석의 슬라이더는 갑자기 사라졌다
1992년 그의 슬라이더는 선동열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웬만한 직구와 맞먹는 스피드로 날카롭게 꺾였다. 각도만큼이나 컨트롤도 완벽했다. 1992년의 기록과 이후 기록을 비교해 본 이들은 ‘그 슬라이더는 왜 갑자기 사라졌는가’라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염종석의 슬라이더는 1993년에 사라진 게 아니다. 염종석은 “1995년까지 구위는 신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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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종석의 오른쪽 어깨와 팔꿈치에는 힘들었던 15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사진 김병준) |
염종석이 자신의 슬라이더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는 1997년이다. 염종석은 1995년 연말에 수술을 받고 지루한 재활기간을 거쳤다. 염종석은 재활 뒤 등판에서 전만큼 팔을 자신 있게 뻗지 못한고 있음을 느꼈다. 슬라이더의 각도가 밋밋해졌고 마음 먹은 곳에 꽂히지도 않았다. 부상의 공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피드는 떨어지지 않았다. 변화구 투수로 변신한 요즘도 슬라이더는 염종석이 가장 자신 있게 던지는 공이다.
‘선동열급 슬라이더’를 갖고 있던 염종석은 왜 선동열만큼의 활약을 딱 한 시즌만 보였을까. 이유는 아마 염종석이 1995년까지 자신의 표현대로 “직구와 슬라이더 딱 두 개 구종만 던지는” 투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동열도 직구와 슬라이더에 의존했지만 직구의 질이 달랐다. 염종석은 1992년 자신의 직구 스피드가 시속 144~145km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선동열의 공은 그보다 더 빨랐고 질도 좋았다.
신화를 벗긴 뒤
염종석에게 비극의 음울한 배경 음악을 걷어낸다면 무엇이 남을까. SK 전력분석팀의 김정준 과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투구는 강약의 두 요소를 갖고 있다. 올해 염종석은 약을 활용하는 방법을 깨우친 것 같다. 한화 문동환이 재기한 길이다.” 메이저리그 363승 투수 워렌 스판은 “타격은 타이밍, 투구는 타이밍 빼앗기”라는 명언을 남겼다. 강속구도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을 수 있지만 느린 공으로도 얼마든지 타자의 타이밍을 교란할 수 있다.
지난 날 직구-슬라이더 투수였던 염종석은 올해 성공적으로 기교파 투수로 변신하고 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염종석은 힘에 의존하는 투수였다. 포심패스트볼 구사율은 70%가 넘었다. 그러나 첫 수술 뒤에 투심패스트볼, 즉 싱커를 익혔다. 살짝 떨어지는 싱커는 스피드보다는 볼 끝의 움직임이 중요한 구종이다.
2000년대 이후에는 포크볼을 익혔다. 과거 옆으로 날카롭게 휘는 슬라이더는 각은 무뎌졌지만 좀 더 종적으로 변했다. 모두가 떨어지는 구종이다. 올해는 느린 커브가 좋아졌다. 지난해에도 간간히 던지긴 했지만 올해는 컨트롤이 더 좋아졌다. 여기에 와인드업 때 왼쪽 다리를 치켜 올렸다 잠깐 멈춘다. ‘이중 투구’라는 항의를 받지 않을 만큼의 짧은 시간이지만 이 때문에 타자들은 타이밍을 빼앗긴다.
투수 출신인 김과장은 1992년 LG에 선수로 입단한 뒤 1997년부터 전력분석요원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투수들을 관찰했다. 그는 염종석의 변화를 “힘에서 떨어짐, 떨어짐에서 다시 약함”으로 요약했다.
염종석은 아직도 “파워 피처들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다. 젊은 시절 그가 그랬다. “지금 내 공은 공도 아니다”고 멋쩍게 웃는다. 그러나 그 공으로 염종석은 올시즌 롯데의 돌풍을 이끌고 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도 하다.
“대략 2000년부터 내가 파워 피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때 이후 힘에 의존하는 피칭을 버렸다”는 게 염종석의 말이다. 힘을 앞세우는 투수가 기교파로 변신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염종석은 부상 후유증까지 갖고 있다. 변신 과정은 힘들었을 것이다. 느린 커브의 위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까지 몇 년이 걸린 셈이다.
염종석은 비운의 사나이인지도 모른다. 데뷔 시즌의 혹사는 당장은 아니었지만 그 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운의 투수 염종석’이라는 말은 그를 15년 전 기억 속에 가둬두는 굴레일 수도 있다.
2007년 현재 염종석의 눈은 미래를 바라본다. 그는 롯데에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훈련하는 투수다. 시즌 초반의 기록은 믿을 게 못 된다. 투수는 기복이 있고 염종석은 지난해까지 비교적 기복이 심한 투수였다. 올시즌 초반의 성과를 얻기까지 그는 많은 땀을 흘렸다. 과거는 오래 전에 잊어버렸다.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는 가장이기도 하다. 가장은 언제나 현실적이어야 한다.
염종석은 올해 호투 이유에 대해 "좋아하던 튀긴 음식을 줄인 덕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투수의 장수 비결'로 '프라이 요리를 먹지 말 것'을 든 사람이 있었다. 50대까지 현역으로 뛰었다는 전설적인 흑인 투수 새철 페이지다.
SPORTS2.0 제 51호(발행일 05월 14일) 기사
인천=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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