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9월 스위스 로카르노에 간 적이 있다. 데이비스컵 월드그룹 진출을 다투는 한국과 스위스의 플레이오프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는데 대표팀이나 기자 모두에게 별 부담 없는 ‘여행’이었다. 세계 100위 안에 드는 선수가 한명도 없는 한국 테니스가 세계 16강에 들지 못했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당시 스위스의 에이스는 92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한때 세계 9위까지 올랐으며 최고의 강서버로 이름을 날렸던 마르크 로제였다. 첫 단식에서 세계 298위였던 이형택이 22위였던 로제와 맞붙었다. 로제는 첫 서비스게임을 에이스 4개로 가볍게 끝냈다. ‘역시 안되는구나’ 싶었는데 곧바로 이형택이 에이스를 포함한 위너 4개로 자신의 게임을 지키며 맞섰다. 결국 패했지만 이형택은 두차례나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지난달 열린 슬로바키아와의 데이비스컵 플레이오프에서 혼자 단복식 3승을 거두며 한국을 20년만에 월드그룹으로 끌어올린 이형택을 만나러 올림픽공원으로 가는 길에 ‘로카르노의 추억’을 새삼 떠올리게됐다. 이번 뿐 아니라 그가 ‘세계의 벽’을 넘어설 때마다 로카르노에서의 그 강렬한 느낌은 되살아났다. 2000년 US오픈에서 16강에 올랐을 때도. 2003년 시드니에서 한국 테니스 사상 첫 투어대회 타이틀을 따냈을 때도 그랬다.
무릎 부상 때문에 전국체전 출전을 포기하고 20일부터 열리는 삼성증권배 챌린저를 준비하고 있는 이형택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데이비스컵은 물론이고 7년만의 메이저대회 16강과 자신의 최고랭킹 경신 등 올 한해 알찬 수확을 거둔 그에게서 테니스에 대한 자신감과 여유가 느껴졌다.
◇2000 vs 2007
그는 지난달 US오픈에서 16강에 올랐다. 7년전 한번 이뤘던 것이지만 또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놀라움은 컸다. 그 자신도 이번 16강에 대한 자부심이 더 크다고 했다. “2000년에는 그런 큰 대회가 처음이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어요. 얼떨결에 가서는 아! 이게 그랜드슬램이구나 하는 정도였죠. 모든 게 신기했어요. 그때 상대했던 스킬라치라는 선수가 십몇위였는데 누군지도 잘 몰랐어요. 이번엔 기예르모 카나스도 그렇고 앤디 머레이도 그렇고 나름대로 투어에서 잘 알려진 선수들이죠. 그런 선수들을 이기고 16강 갔다는 게 뿌듯해요.”
7년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투어대회보다 한 단계 아래인 챌린저에 출전했던 그가 이제는 어엿한 투어선수다. 피트 샘프러스를 비롯해 마이클 창. 앤드리 애거시.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등 쟁쟁한 선수들과도 대결해봤다. “2000년 이후에도 다른 선수들에게 이형택이라면 그저 같이 투어 뛰는 선수라는 정도였어요. 별로 경계하지 않았죠. 지금은 저랑 붙는다면 한번씩 더 생각해볼 만큼 달라졌죠. 예전에는 힘으로 테니스를 했지만 지금은 게임 운영이나 포인트 관리로 해요. 공격할 때 공격하고 수비할 때 수비하고. 그러다보니 기복이 별로 없죠.” 두 아이를 둔 가장이 된 것도 달라진 점이다. 지난해 첫딸을 얻었고 올 US오픈을 앞두고 아들이 태어났다. “하나에서 둘이 되니 책임감도 더 커졌어요. 1년에 8.9개월은 외국에 있는데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테니스가 잘되니까 보람이 있어요.” 그동안 돈도 많이 벌었겠다고 묻자 그는 “아직 아니에요. 둘째가 잘 먹어서 더 많이 벌어야돼요”라며 웃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긴 만큼 당연히 나이도 먹었다. 그는 우리 나이로 올해 서른셋이다. 세계 50위 안에 드는 선수 가운데 그보다 나이 많은 선수를 찾아보기 어렵다. “10년 차이 나는 선수도 있고 여덟살 정도 어린 선수는 흔하죠. 아직까지는 나이가 들어서 힘든 건 모르겠어요. 물론 힘이 안드는 건 아니고 힘들 때 잘 극복할 수 있게 된 거죠. 전에는 힘들면 견디기 어려울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힘드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니까 몸도 좋아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목표는 달성 가능한 것으로
현재 세계 45위인 그의 최고랭킹은 지난 8월 첫주에 기록한 36위다. 단식 통산전적은 147승 144패. 통산상금도 200만달러가 넘었다. 앞으로 무엇을 더 이루고 싶을까. “항상 목표는 높게 잡지 않아요. 톱10에 든다든가 하는 것보다는 달성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정해요. US오픈 16강 갔으니까 다시 한번 가고 싶었고. 데이비스컵 플레이오프 해봤으니까 월드그룹에 가보고 싶었고 그런 식이죠. 그러다보면 또 새로운 목표가 생길 거고. 그런 목표들을 달성하는 게 재미있어요. 내년에는 베이징올림픽에 뛰고 싶어요. 이번에 가게 되면 4번째인데 한국에서 이렇게 많이 나간 선수 별로 없잖아요. 뭐든지 하면 다 한국인 최초인데 그런데 대한 기대가 부담도 되지만 잘해야 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랭킹요? 그것도 할 수 있는데까지 올려야죠.” 그는 세계랭킹이 10위 올라갈 때마다 회사(삼성증권)에서 포상금을 받는다.
한국은 내년 2월 데이비스컵 월드그룹 1회전에서 독일과 맞붙는다. 플레이오프 3번 출전만에 마침내 월드그룹 무대에 서게 된 그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책임감을 느낀다. “월드그룹에서 우리가 제일 약해요. 상대팀 2위도 저보다 랭킹이 높은 선수니까. 거기다 홈도 아니고 원정이잖아요. 그렇지만 열심히 해야죠.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를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할겁니다. 외국선수들이 축하를 하더라구요. 테니스 강국인 호주가 이번에 1그룹으로 떨어졌거든요.”
수영의 박태환이나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처럼 그도 한국 토양에서는 나올 수 없는 ‘돌연변이’다. 그래서 외롭고 안타깝다. 세계 수준의 선수가 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뒤를 이을 선수가 눈에 띄지 않는다. “여자 골프는 박세리 선수가 성공하고 나서 여럿이 나왔으니까 잘 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테니스는 저 이후에 아무도 없잖아요. 제가 8강을 기본으로 가고 그런다면 중계도 자주 할텐데 1회전에 져버리면 끝나니까. 작년에 페더러와 나달이 한국에 와서 경기할 때 봤는데 멋지고 보기 좋았어요. 우리도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100위 안에 드는 선수가 3.4명 정도만 돼도 좋겠어요. 한명이 지더라도 다른 선수가 올라가고 그러면 매스컴이 비중있게 다루고 테니스 인기도 좋아질텐데. 그럴려면 많은 투자가 필요해요. 국내 선수층은 오히려 전보다 얇아진 것 같아요. 위에 있는 선수들이 잘해줘야 돈벌이도 되고 그러는구나 하면서 많이들 할텐데.”
◇테니스. 이제는 즐긴다
그는 요즘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테니스가 잘되고 있는 것도 그 덕분이라는 것이다. “작년부터 경기 전에 다짐하는 게 있어요. 상대보다 많이 뛰자.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그리고 즐기자. 선수들은 모두 경기를 즐기고 싶어하지만 정말 즐기는 선수는 별로 없어요. 한창 때는 못하는 거거든요. 은퇴를 앞둔 선수가 즐기겠다고 말하고 그리고 나서 성적이 갑자기 좋아지는 경우가 있죠. 팀 헨먼도 재작년인가 은퇴 이야기가 나올 때 이제부터는 즐기겠다고 그러더니 프랑스오픈에서 4강에 가더라구요.”
아직까지는 모든 게임을 즐기지는 못한다고 한다. 대진이 좋아서 꼭 이기고 싶은 경기에서는 욕심 때문에 자신의 플레이가 안 나오고 소극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번에 미국 가서 유학중인 (김)치완이형을 만났는데 나더러 ‘야. 참 멋있다. 넌 정말 복받았다’ 그러더라구요. 큰 무대에서 경기를 하고 수많은 관중의 박수를 받는 게 부럽다는 거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는데 즐겨야죠. 남들이 내게 박수를 치는데 나는 열받아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만으로도 몸이 가벼워지고 움직임이 편해져요.” 당연히 은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테니스를 좀 더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코트 위에서만 즐기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세계 각국을 다니며 경기를 하면서 오로지 경기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프랑스오픈에 가면 개선문을 보러 갈 만큼 여유가 생겼다. 선수를 그만두면 할 수 없는 경험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훈련이나 연습도 편안한 마음으로 한다. “지금은 서브파워를 높인다 뭐다 그런 것을 할 때는 아니죠. 경기에 필요한 기본 연습 위주로 해요. 테니스를 하다보니까 연습하는 게 기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요. 좋은 공 하나 잡았을 때 끝내는 것이라든가 그런 거죠. 마음을 편하게 먹으니까 플레이나 작전이 다양해졌어요. 긴장하면 하나밖에 안보이거든요. 그런데 여유가 생기니까 넓게 보여요.”
최정식전문기자 bukra@ 사진 | 성복현전문기자 hsung@
| ⊙ 이형택 "영어 못해 어필 하지 않아 흥분도 안했다" |
| 이형택이 아쉬워하는 것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좀 더 일찍 큰 무대에 뛰어들지 못한 것. 또 하나는 영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다. 2000년 US오픈 이후 영어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아직까지도 영어에는 자신이 없다.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위해 미국에 유학을 가면 그때 영어를 배울 생각이다. “영어를 했으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편했을테니까. 경기 끝나고 인터뷰라든가 테니스 클리닉이라든가 여러 면에서 필요한데 의지가 부족해서 못한 게 아쉬워요.” 그런데 영어를 못하는 게 좋을 때도 있다고 한다. “경기에서 어필을 많이 하지 않고 좀처럼 흥분도 안하게 돼요. 어필 많이 하면서 잘하는 선수 별로 없어요. 페더러는 표정 변화도 없고 조용하지만 누구나 무서워하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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