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은 끝났지만, 각 구단 단장들은 여전히 쉴 틈이 없다. 곧바로 '스토브리그'라는 새로운 리그에 돌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 구단의 FA 대상자들과의 협상, 외국인 선수 계약, 트레이드 교섭 등으로 단장들은 오히려 정규시즌보다 더 숨가쁘고 긴장감에 넘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스토브리그 기간은 다음 시즌 팀의 한 해 농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다. 행여 FA 먹튀를 거액에 영입하거나 '제 2의 숀 헤어'라도 데려오는 날에는 팀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참담한 결과를 맞을 수도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미래로 시간여행을 해서라도 내년 시즌을 성공으로 이끌고 싶은게 단장들의 솔직한 심정일 게다.
그런데 타자는 몰라도 투수의 경우에는, 내년 시즌 성적을 미리 예측하는게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세이버 메트리션들이 고안해낸 DIPS(수비 무관 추정 방어율)라는 스탯을 활용하면 투수의 올시즌 성적에 얼마만큼 거품이 끼었는지는 물론, 다음 시즌에 올해와 비교해 나은 성적을 낼지 여부까지 예상이 가능하다. 실제로 미국의 세이버메트리션들은 이 방법을 활용해서 주요 FA들의 다음해 성적을 거의 정확하게 예언해 내기도 했고, 많은 판타지게임 유저들 역시 DIPS를 사용해 좋은 성적을 기록한 사례가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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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DIPS란 무엇인가? DIPS는 수비수의 지원이나 경기중 생기는 각종 '행운(불규칙 바운드, 호수비, 쉬프트 적중 등)'의 요소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투수 개인의 능력만을 측정하기 위해 고안된 스탯이다. 이 스탯은 일단 투구가 타자의 배트에 맞아 '인플레이'가 되면 그 이후는 투수의 통제 범위 밖에 있다는 이론을 토대로 삼는다. 다시 말해 맞아나간 타구가 안타가 될지 아웃이 될지, 불규칙 바운드가 될지 라이너가 될지, 쉬프트에 걸려들지 아니면 수비수 사이로 빠져나갈지 등의 요소는 투수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부분이라는 얘기다. DIPS는 이런 요소들은 순전히 '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 제외하고, 투수가 통제 가능한 항목인 삼진과 볼넷과 HBP, 홈런 등의 요소에 가중치를 부여한다.
DIPS 구하는 공식 - ((피안타-피홈런)*0.49674+(피홈런)*1.294375+(볼넷-고의4구)*0.3325+(고의4구)*0.0864336+(삼진)*(-0.084691)+(사구)*0.3077+(타석수-사구-볼넷-삼진-피안타)*(-0.082927))*9/(투구 이닝)
본래는 파크 팩터를 적용해야 하지만 한국 구장들의 차이가 크지 않은 점을 고려해서 공식에서 제외함
이렇게 해서 구한 DIPS를 투수의 방어율과 비교하면 투수가 방어율에 얼마나 거품이 끼어있는지, 또는 투구내용에 비해 얼마나 운이 따르지 않았는지 등을 밝혀내는 게 가능하다. 가령 어떤 투수가 2점대 초반의 방어율을 기록했지만 DIPS는 3점대였다면, 이 투수의 실제 투구내용에 기초한 방어율은 3점대이지만 수비 지원이나 운(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가는 따위의)에 의해 2점대 방어율을 기록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누군가가 5점대 방어율을 기록중이지만 DIPS는 4점대 초반이라면, 실제 투구내용이나 구위에 비해 운이 따르지 않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를 토대로 투수의 다음 시즌 성적을 예측해볼 수 있다. 방어율에 비해 DIPS가 나쁜 시즌을 보냈다면, 그 투수는 다음 시즌 올해보다 성적이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DIPS가 방어율보다 좋은 시즌이었다면, 다음해 성적은 올해보다 향상될 공산이 크다. DIPS를 통한 성적 예측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DIPS를 활용한 예상이 언제나 100%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사실 100% 적중률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현재도 타구의 방향이나 타구질이 과연 투수가 통제 불가능한 영역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DIPS를 개발한 세이버메트리션들도 현재는 처음의 완고했던 이론을 일정부분 수정해 나가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이 스탯을 통한 예상은 리그나 팀을 옮기는 변화, 구장 변경, 새로운 구종의 추가와 부상 등의 요인에 의해 얼마든지 무력화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DIPS를 이용한 예상이 실제 성적에 대부분 잘 들어맞았고, 다른 스탯들에 비해 적중률과 효용성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프로야구 투수들의 2008년 성적과 2007년 DIPS를 비교해본 결과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번 2007년 DIPS가 방어율보다 나빴던 투수 10명의 2008년 성적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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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PS와 방어율의 차이를 퍼센테이지로 구했을 때, 1.00 이상을 기록한 투수 상위 10명을 도표로 나열해 보았다. 한 눈에 볼 수 있듯이 성적이 나아진 투수는 채병룡과 손민한 두 명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대폭 하락하거나 아예 리그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맞았다. 여기서 손민한의 경우 방어율 자체는 향상된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 피안타율이나 탈삼진율, WHIP 등과 같은 다른 투구 지표들은 2007년에 비해 대폭 하락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2007년 DIPS가 방어율보다 좋았던 투수 10명의 2008년 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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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PS%가 1.00 이하를 기록한 투수 10명 가운데 이닝수가 75이닝 이상인 선수들만을 추려 보았다. 여기서 실제 성적이 하락한 선수는 조용훈과 이대진 두 명이다. 이 중 조용훈의 경우에는 소속팀의 사정으로 인해 정상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눈여겨볼 선수는 임창용이다. 임창용은 2007년 생애 최악의 기록을 남겼지만 실제 DIPS를 통해 본 투구내용 자체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올해 일본 프로야구에서의 대성공으로 드러났다고 해도, 지나친 확대 해석은 아닐 것이다.
FA와 외국인 투수들, 내년에 어떨까
DIPS를 통한 예측이 어느 정도 적중률을 보이는지, 위의 도표를 통해 어느정도 증명이 되었으리라 본다. 그러면 이제 앞서 언급했던 FA 투수들의 내년 시즌 성적을 예측해볼 차례다. 이번 FA 대상 24명 가운데 투수는 총 10명, 그 중 올시즌 75이닝 이상을 투구한 선수는 7명 정도다. 이들 가운데는 정민철이나 김수경처럼 FA 신청을 포기한 선수도 있고, 이상목처럼 은퇴 수순을 밟게 될 투수도 있지만, 그에 상관없이 모두 목록에 포함시켰다. 또한 8개 구단에서 올해 활약한 외국인 투수들 가운데 75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들도 함께 포함해서 시즌 DIPS와 방어율을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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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의 에이스인 손민한은 매우 위험하다. 올시즌 2점대 방어율에 12승을 따내기는 했지만, 후반기 그의 투구는 1선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DIPS는 3.56으로 시즌 방어율 2.97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수준이다. 현재 일본 진출과 롯데 잔류를 놓고 저울질하는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DIPS를 통해 드러난 바로는 그와 다년간 고액 계약을 맺는 것은 시한폭탄을 떠안는 것과 다를바 없어 보인다. 특히 그의 나이나 최근 몇년간의 투구 이닝, 현재 구위 등을 따져볼 때 특별히 '리바운드'될 만한 요인이 없기에 더욱 불안감이 크다. 롯데는 단순히 에이스의 자존심이나 팬들의 성화 등에 좌우되지 말고, 냉정하게 그의 미래가치를 평가해서 계약에 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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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일본행을 한창 타진중인 이혜천은 정확한 예측을 하기 힘든 DIPS% 값을 보여주고 있다. 대개 1.00에 근접한 값을 보이는 선수들의 경우에는 다음 시즌 예상과는 전혀 다른 큰 폭의 변화(향상이든 추락이든)를 보여주는 예가 많은데, 이혜천의 경우도 성적만을 놓고 보면 전혀 예측 불허다. 다만 구위 자체에 몇년간 큰 쇠퇴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독특한 팔 각도의 좌완 투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새로운 리그 진출 시에는 의외의 성공을 거둘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물론 그가 플라이볼 피처이고 넓은 잠실구장의 덕을 봤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리라 본다.
또 올해 유독 부진한 모습을 보였던 정민철의 경우 의외로 내년 시즌 전망은 나쁘지 않다. 사실 올해 그의 소속팀 한화가 수비율 .989에 수비범위 6.56으로 리그 최하위급의 수비력을 보여준 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은퇴 쪽이 유력한 이상목 역시 생각과는 달리 내년 시즌 리바운딩 가능성이 큰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올해 활약한 세 외국인 투수들의 전망이 굉장히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레이번은 올해 방어율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이닝 소화 능력이나 피안타율, 삼진율 등이 모두 크게 저조한 모습을 보였는데, SK는 재계약을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LG 역시 올해의 활약만을 갖고 옥스프링을 3년째 데리고 가기에는 껄끄러운 점이 분명 존재한다. 물론 투수력이 약한 팀이기 때문에 쉽게 재계약을 포기하지는 못하겠지만.
내년 성적이 향상될 투수들 & 나빠질 투수들
이번에는 올해 DIPS가 방어율보다 좋았던 투수들과 나빴던 투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올시즌 방어율보다 나은 DIPS를 보여준, 다시 말해 내년 성적이 향상될 가능성이 높은 투수들의 목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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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즈 황두성이 눈에 띈다. 황두성은 올시즌 팀 사정상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마당쇠' 노릇을 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나쁘지 않은 투구 내용을 선보였다. 확실한 보직을 얻을 수 있다면 내년 시즌 그의 성적은 더 나아질 가능성이 높다. 삼성의 윤성환과 LG의 정찬헌, 두산 김명제 등의 젊은 투수들의 이름도 눈에 띈다. 특히 윤성환은 위력적인 직구와 커브 조합을 구사하는 투수로서, 선발 전향 첫 해임에도 인상적인 시즌을 보냈다. 내년 시즌에는 더욱 안정감 있는 선발투수로서의 투구를 기대할 만 하다. 고졸 1년차인 정찬헌은 선발 전향 뒤 극도의 부진을 보였지만, 투구 내용 자체가 기록만큼 형편없었던 것은 아니다. LG 팬들에게 내년 시즌 정찬헌의 맹활약을 기대해 보도록 주문하고 싶다.
삼성 정현욱의 경우는 쉽게 예측하기 힘들다.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거의 필리핀 나이키 공장 어린이만큼의 혹사를 당한데다, 부상 경력과 공백기가 있어 몸 상태가 어떨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삼성팬들은 그가 내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투구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년에는 상식적인 주인을 만나게 되기를 염원해야 할 듯하다. 두산 김선우의 경우는 내년 시즌에는 확실히 올해보다 좋아질 것이다.
다음은 DIPS가 방어율보다 나빴던 투수들, 즉 내년 성적이 올해보다 나빠질 가능성이 큰 투수들의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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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시즌 최강의 선발진을 보유한 팀은 롯데가 아닌 SK였다. 하지만 위의 기록에서 드러나듯 내년 시즌에도 SK가 올해와 같은 선발진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레이번의 경우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고, 채병룡과 김광현도 올해같은 투구를 다시 선보일 가능성은 많지 않다. LG 팬들에겐 아쉬운 일이지만, 올해 원투펀치 역할을 해준 봉중근-옥스프링 역시 내년에는 올시즌만 같지 않을 것이다. 팀내 다른 투수들의 분발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롯데도 선발진 중 세 명이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다. 손민한의 경우는 앞서 언급했듯 구단의 냉정한 계산이 요구되는 대상이고, 장원준은 올해가 최고 정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송승준은 올해 다소 떨어진 직구 구위를 되찾는 것이 급선무다.
지금까지 DIPS를 통해 간단하게나마 투수들의 내년 시즌을 예상해 보았다. 항상 하는 얘기지만 세상에, 특히 야구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기록이란 어제까지의 것일 뿐이며, '오늘-지금-여기'에 대해 기록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팬들이 위의 내용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마음 같아서는 부정적인 예상은 다 빗나가고, 긍정적인 예상만 전부 들어맞았으면 하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내년 시즌 전망이 어두운 것으로 드러난 선수들이 겨우내 열심히 땀을 흘리고 약점을 보완해서, 이 글을 '펠레'의 저주로 만들기를, 세상 모든 숫자놀음을 우스운 것으로 만들기를 바란다.
Posted by Yagoora (yagoo.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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