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인터넷을 좀 줄였더니, 어느새 8개구단 용병 영입 작업이 마무리되었더군요..
롯데는 코르테스 대신 존 애킨스라는 용병을 영입했다고 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투구 동영상을 볼 수 있었는데요..
제 능력으로는 동영상 링크를 바로 걸 수 없어서 주소만 가지고 왔습니다..


일단 경기 동영상을 본 후의 소감은...살짝 불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_-;;
이 선수..특히나 구속은 작년의 코르테스와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직구에서 느껴지는 힘은 살짝 부족하지 않나 싶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건 국내에서 직접 던지는 걸 보고 판단해야 할 것 같다는...)

그리고 변화구 구사 능력은 확실히 코르테스보다는 한 수 위인 것은 확실한 듯 합니다..
작년에 코르테스 후반기에 올라와서 체인지업이 주무기라고 했는데,
언제 보여주나 기다리다가 결국 포스트시즌 갔고, 직구로 승부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얻어맞았을 뿐이고!! -_-;;

문제점은 역시나 제구력이 불안하다는 것..

개인적으로 마무리 투수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게,
일단은 타자를 힘으로 압도할 수 있는 묵직하고 빠른 직구..
그리고 거기에 확실한 변화구 하나..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제구력...
(이거 다 갖추면 뭐..누가 30세이브 이상 못하겠습니까만..-_-;;)

그래도 쓰고 보니 2/3는 갖춘 셈이군요..
아로요 코치가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으니, 일단은 믿고 기다려봐야겠습니다..
극성스런 롯데 팬들의 특성상 초반 3-5경기 정도가 관건이 될 듯 하네요..

나머지 기사 아래에 첨부합니다..^-^

덧..영상 및 기사의 출처는 갈매기마당입니다..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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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길게 말해 무엇하리..
자이언츠 팬들의 마음 속에서는 지울래야 지울수가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을..

본인은 82년생으로서, 그가 직접 던지는 모습을 경기장에서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과거의 영상 자료에서 마운드 위의 그의 투구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근성과 투지..그리고 진하게 느껴지는 본능적 아웃사이더의 삐딱함과 싸움닭의 배짱..

(지금 현역 롯데 투수 중에서 송승준을 좋아하는 이유도,
가운데 꽂아서 한 방 맞더라도, 과감하게 승부를 거는 그런 배짱 때문이다..
(물론 직구 구속이나 구위가 미국에 있던 전성기때만큼 안되는데 자꾸 던지니까 문제긴 하다만...-_-;;))

그런 성격 때문에 구단과는 틀어져서 힘들지 않겠나 싶지만..
최동원 선수가 자이언츠의 감독이 되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p.s 자이언츠 팬들은 선수들을 그들과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특히 심하다고 한다..;;;

그렇게 꼴지를 한다고 욕을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다음에는 함 안 이기겠나??" 하면서 또 기대하고...

잠깐의..불꽃처럼 화려했던 정상에서의 시간에 이어
부상으로 예전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애틋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응원하고,
트레이드 되어서 타팀으로 가도 롯데에게 보란듯이 잘하길 바라는 마음들..

거기에는 그 선수의 모습에서 우리의 인생을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다음번에는 잘 할 수 있다는..또 잘 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동열보다 더 사랑받았던 단 한 사람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1989년, 최동원이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그 앞으로도 뒤로도 야구장에서는 느껴본 적이 없는 어색한 풍경이었다. 하늘색 라이온즈 유니폼은 마치 얻어입은 것처럼 겉돌았고, 최동원이 빠지고도 롯데 자이언츠를 여전히 '롯데 자이언츠'라고 부른다는 사실 또한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해마다 연봉 협상에서 몇십만원 되지도 않는 돈을 놓고 자존심 싸움을 하느라 질려버린 데다가 선수회 결성을 주도하며 미운 털까지 박힌 골칫덩어리를 치워버리고 싶었던 롯데와, 어떻게든 우승을 하려면 최동원 같은 근성과 투지의 에이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삼성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였다.

한국프로야구사상 유일무이한 '한국시리즈 4승 투수' 최동원과 '최초의 100승 투수' 김시진이 맞바꾸어지는 초대형 트레이드는 그렇게 이루어졌고, 두 대투수의 전설도 그 순간 서둘러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야구의 대명사, 최동원

▲ 프로 데뷔 전부터 한국야구의 상징이었던, 최동원

17이닝 노히트노런과 한 경기 20탈삼진의 고교시절, 일주일간 6경기에 등판에 3승을 쓸어담던 실업시절과 비교하자면, 프로 데뷔무대에서 그의 활약은 팬들의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것이었다.

ⓒ 롯데 자이언츠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이었던 1980년대 초반, 형이 선린상고에 다닌다든가, 아버지가 군산상고나 경북고 출신이라든가 하는 특별한 축복을 받지 않은 평범한 열 살 안쪽의 아이가 '야구'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첫 번째 이름은 단연 최동원이었다. 축구라면 차범근, 농구라면 신동파나 박찬숙이 그랬듯, 그 이름은 그대로 야구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그 뿐인가?

'한 시간 동안 움직일 수 있는 거리'로서 가늠되는 '시속'이라는 물리학의 속도개념을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는 꼬마 녀석들이 알 수 있었던 것 또한 최동원 때문이고, 그 '시속'을 측정할 수 있는 '스피드건'이라는 기계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던 것 또한 최동원 때문이었다.

스피드건이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그걸로 최동원의 공을 측정했더니 나왔다더라는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달리는 버스보다 두 배 반이나 빠른 것으로서,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속도'라고 친절히 설명해주셨던) '150'이라는 숫자는, 또한 신동파의 50득점(3점 슛이 없던 시절의 기록), 차범근의 98골, 장훈의 3000안타와 별다를 것 없이 현실감 없는 경지의 이미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대단하다는 최동원이 프로무대에 나타났던 1983년, 동네 아저씨들은 이미 '예전의 최동원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고, '한 오륙 년 전에 프로가 생겼으면 한 몫 했을'거라고 혀를 찼다. 지금 따져보면 208.2이닝을 던지며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대활약이었음에도, 사람들은 이기는 경기(9승)보다 지는 경기(16패)가 훨씬 많은데다가 427.1이닝을 던졌던 재일교포 퇴물투수 장명부의 절반만큼도 못 던지는 '유리어깨'로 전락한 최동원을 용납하지 못했다.

하기야 경북고와 선린상고를 상대로 이틀 연속 등판해 17이닝동안 노히트노런을 이어가고 군산상고를 상대로 20개의 삼진을 빼앗아내던 경남고 시절, 그리고 일주일동안 여섯 경기에 등판해 3승을 따내며 '코리안시리즈'를 석권했던 실업야구 롯데 시절의 '완벽투'에 대한 기억과 마주 세우자면 초라할 수밖에 없는 기록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미 오륙년 전쯤 지나가버렸다는 그의 전성기에 대한 궁금증만이 쌓여가기 시작할 무렵, 그는 제대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그 전설적인 84년의 대폭발을 보여주었다.

서른 한 번의 승리, 1984년

▲ 1984년, 한국시리즈 MVP

1,3,5,7차전 완투(3승 1패)와 6차전 구원승(5이닝 무실점). 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은 글 몇 줄 만으로도 읽는 이의 숨이 턱턱 차오르게 만드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 롯데 자이언츠

한국 프로야구사상 '한 시즌 최다승 투수'로 기록되어있는 것은 1983년에 30승을 올린 장명부다. 그러나 말 그대로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승리를 기록한' 투수는 정규시즌의 27승에 이어 한국시리즈 4승을 올린 1984년의 최동원이었다.

원년 에이스 노상수의 군입대, 그리고 부산의 기대주 양상문·윤학길의 아마추어 잔류로 마운드가 텅 비게 되면서 3년째 하위권 탈출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던 1984년의 롯데 자이언츠가 한국시리즈 우승컵까지 품에 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드라마였고 기적이었다.

최동원이 1·3·5·7차전 완투(3승 1패)와 6차전 구원승(5이닝 무실점)으로 홀로 우승을 이끌었던 그 해의 한국시리즈야 워낙 널리 알려진 사건이니, 새삼 다시 회상하기도 민망하다. (그래도 혹시 궁금한 분이 계시다면, 지난 해 8월 < 주간동아 > 에 기고했던 글 " 뜨고 진 그라운드의 별들, 아직도 내 가슴에… " 를 참고해주시기 바란다.)

그러나 임호균을 필두로 배경환·안창완 같은 투수들이 앞서나가기 시작한 경기를 최동원에게 넘겨주는 순간까지 버텨내기 위해 120%의 능력을 짜내 안간힘을 써대고도 5회 이전이라도 마운드를 내려와 성적으로 보상받지 못하는 희생정신을 발휘했던 것도, 1할 타자 유두열이 끝내 희망을 놓지 않고 김일융의 지친 호흡을 노려 한국시리즈 7차전 역전 결승홈런을 만들어낸 것도, 매번 24시간도 채 못 되는 휴식시간을 마친 최동원이 어깨 붕붕 돌리며 나타나 마지막 저항을 소탕하고 숨 가쁜 1승을 만들어 주리라는 진땀나는 믿음 덕분이었다는 말만은 덧붙여두고 싶다.

두 번째로 위대한, 그러나 가장 사랑받는 투수

▲ 최동원과 임호균

부산야구의 상징 최동원과 인천야구의 상징 임호균, 그들은 84년 롯데가 일군 기적의 주연과 조연이었다.

ⓒ 롯데 자이언츠

그렇게 최동원은 부실한 팀을 한 어깨로 끌고 나가는 선봉장이었고, 무수한 공백을 한 몸으로 막아내는 수문장이었기에, 그에게 '에이스'를 넘어 '수퍼 에이스'라는 찬사가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연속홈런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 타자가 뻔히 알고 기다리는 길목으로 승부구를 우겨넣어 3구 삼진을 노리는, 그리고 홈런을 맞은 다음 타석에서는 다시 한 번 똑같은 코스로 더 강한 공을 던져 오기와 배짱을 겨루는 격렬한 승부사였던 그는 고작 '수퍼 에이스'라는 이름이 주는 든든함과 단단함에 머물지 않는 매력을 가진 투수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투수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항상 한 호흡 멈칫하게 된다. 선동열과 최동원이라는 이름 두 개가 동시에 튀어나와 같은 극의 자석처럼 부대끼기 때문이다.

그래도 프로야구의 시대로 한정 짓자면, 한국에서 선동열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투수는 최동원을 포함해 아무도 없다. 다승으로든 평균자책점으로든. 그리고 선발투수로든 마무리투수로든, 그는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압도적으로 승리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 꼭 이겨야만 하는 경기, 가장 절박한 순간의 마운드를 놓고 고민해본다면, 나 역시 최선의 선택은 최동원이 아니라 선동열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것을 넘어, 박살을 내고 가루를 만들어버리든, 하얀 재가 되어 사라지든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신념과 자존심의 승부라면, 어제 경기에서 15이닝쯤 완투한 피로를 이기지 못해 주저앉아 있을망정 다시 한 번 최동원을 불러내 함께 몸을 던져보고도 싶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는 전형적인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걸어야 할 것을 걸고 노려야 할 것을 노려 확실하고 깔끔하게 완전연소시켜버리는 처절한 승부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선동열보다 조금 더 많은 나이, 조금 더 소모된 어깨, 그리고 훨씬 허약한 전력의 팀이라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 뛰었던 선수였고, 그런 이유로 수많은 팬들의 애틋함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은 지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좀 더 어린 나이, 싱싱한 어깨, 강한 팀이 주어졌다고 해서 선동열보다 나은 성적을 냈으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아니, 그런 상상 자체가 구차스럽다.

▲ 홈런을 맞으면, 더 호쾌하게 웃으며 날을 세우던 투수, 최동원

그는 연속홈런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 타자가 뻔히 알고 기다리는 길목으로 승부구를 우겨넣어 삼구삼진을 노리며 오기와 배짱을 겨루는 격렬한 승부사였다.

ⓒ 롯데 자이언츠

그러나 만일 그에게 좀더 강한 팀이 허락되었고, 든든하게 뒤를 맡아줄 파트너가 주어졌다면, 그는 좀 더 날카롭고 강하게 질주하는 '수퍼 돌격대장'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분명히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가파른 기념비 몇 개를 더 세워두는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냉정하게 한 명의 이름만 말하자면 최동원은 '사상 최고'가 아니다. 그리고 화려했던 한 순간을 지낸 뒤로는, 그리 빛나는 길만을 걸어온 이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 프로야구사상 가장 깊고 애틋한 사랑을 받는 투수임에는 틀림없다.

마치 마지막 장면 정지화면의 콩볶는 듯한 총성 속으로 돌진하던 < 정무문 > 의 이소룡, 혹은 < 내일을 향해 쏴라 > 의 로버트 레드포드와 폴 뉴먼처럼, 길고 긴 여운을 남기는 그의 이름은 그대로 한국야구의 상징이고 드라마이며 추억이다.

앞으로 그가 다시 무엇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든 상관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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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뉴스24

야구계 발칵 뒤집은 '바카라', 도대체 뭐길래?

기사입력 2008-12-09 10:24 기사원문보기



<조이뉴스24>
프로야구 선수의 도박 파문이 단순한 소문이 아닌 실제 사건으로 보도되면서 야구팬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게다가 골든글러브 시상식 즈음에 터진 악재라 야구계 인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검찰의 수사 대상으로 꼽힌 16명의 선수들 가운데는 국가대표급 선수까지 포함돼 있다는 풍문이어서 그 후폭풍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프로야구 선수라는 사회적 선망의 직업을 가진 이들을 억대 도박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을까? 선수들이 많이 했다는 '바카라'가 무엇이길래 그 게임에 빠졌을까?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오른 선수들이 행한 도박은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이용한 '온라인 바카라(baccarat) 게임'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 넘쳐나고 있는 바카라 관련 광고 댓글을 보면 그 접근의 용이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한 바카라 게임은 사이트를 접속한 뒤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계좌를 개설하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다. 인터넷이라는 특성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개인적인 공간에서 얼마든지 도박을 할 수 있으니 홈과 원정을 오가는 바쁜 일정을 보내야하는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도 안성맞춤(?)인 오락거리인 셈이다.

게다가 바카라는 게임 방법마저 간단해 더욱 유저에게 치명적인 유혹을 발산한다. 바카라 게임은 홀짝게임과 비슷한 형태로 플레이어와 뱅커가 가진 각각의 카드 합계가 9에 가까울 것 같은 쪽에게 배팅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와 뱅커는 처음 오픈된 2장의 카드를 받은 후 추가 규칙에 따라 한 장씩을 더 받을 수 있으며 그 카드의 합계가 9에 가까운 쪽이 승리하는 것이다.

J, Q, K, 10 등 속칭 '그림카드'는 0으로 계산하며 에이스는 1로 계산해 카드 수의 총합 가운데 뒷자리 수로만 승패를 가리는 게임이다. 일명 화투를 이용한 '섰다' 게임과 같은 맥락의 도박이다. 특히 바카라는 최소 베팅액이 높고 게임의 순환이 매우 빨라 그 중독성이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기범기자 polestar174@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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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규칙상 홈런과 파울플라이는 동격

김재현(33. SK 와이번스)의 방망이가 바람을 갈랐고, 중심에 제대로 걸린 타구는 중견수 이종욱(28. 두산 베어스)을 향해 뻗어나갔다. 잘 맞은 타구였지만 빠른 발을 가진 이종욱의 수비범위가 워낙 넓은 터라 혹시 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 타구였다.

담장 바로 아래까지 쫓아간 이종욱은 있는 힘을 다해 점프를 했다. 하지만 타구는 뻗은 글러브 위를 살짝 비켜 담장 너머로 떨어졌다. SK와 두산의 2008 한국시리즈 1차전(문학)이 열렸던 10월 26일의 일이다.

이 홈런으로 김재현은 작년(2007) 한국시리즈 최종전이던 6차전에 이어 한국시리즈에서 2경기 연속 홈런을 쳐낸 선수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다음날 벌어진 2차전에서 또다시 홈런을 때려냄으로써 한국시리즈 개인 연속경기 홈런기록(종전 2경기)을 '3'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종욱의 글러브 뒤로 잠깐 사라졌다 튀어 오른 김재현의 타구가 홈런으로 확인되던 그 순간, 필자는 김재현의 홈런보다 이종욱의 담장을 이용한 수비행위에 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2008시즌부터 달리 적용되고 있었던 홈런에 관한 규칙 때문이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주변 얘기로부터 접근해보도록 한다.

미국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나온 진기명기를 보다 보면 외야수가 홈런성 타구를 잡은 여세로 담장을 뚫고 나가거나, 담장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이는 선수들의 안전을 고려해 펜스를 천막 같은 것으로 둘러놓아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럴 경우, 사후 조치는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타자 아웃이다.

반면, 한국은 담장 자체를 아주 튼튼하게 그것도 철조망 등으로 사람의 키보다도 훨씬 더 높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외야수가 홈런성 타구를 잡고 담장을 부수거나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일 자체를 상상할 수 없는 환경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담장이 무너지거나 외야수가 담장 밖으로 넘어가버리는 등의 해프닝은 남의 나라 일로 생각하고 있는 터다.

그러나 만에 하나, 실제 담장 위에 몸을 걸친 상태로 홈런성 타구를 잡아낸 외야수가 그 여파로 인해 외야 담장 밖으로 몸이 훌러덩 넘어가버렸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나라에서는 타자의 기록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년(2007)까지는 홈런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홈런이 아니라 아웃이다. 메이저리그 처럼.

그러면 이 규칙은 소리소문 없이 왜 바뀌게 된 것일까?

지난 5월 29일, 잠실에서 벌어진 두산과 KIA 타이거즈의 경기에서 두산의 1루수 오재원(23)은 3회초 수비에서 차일목(KIA)이 친 파울플라이 타구를 잡기 위해 달려들다 두산 덕아웃 주위에 세워놓은 철책너머로 몸이 넘어가버린 일이 있었다.

당시 그 타구를 잡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오재원이 파울플라이 타구를 잡은 상태에서 철책을 넘어갔다고 가정할 때, 차일목은 아웃이 된다.

야구규칙 7.04의 안전진루권 조항에 따르면 야수가 플라이볼을 잡은 뒤에 벤치나 스탠드 안으로 들어가 넘어진 경우, 타자는 아웃으로 처리된다. (단, 루상에 주자가 있었다면 주자들은 1개 루의 안전진루권을 얻게 된다)

홈런성 타구를 외야수가 잡았을 때도 문구에 나와 있는 그대로 이 규칙을 적용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과거(~2007년까지)에는 홈런에 관해서는 예외적인 잣대를 가지고 해석해왔다. 외야수가 담장을 짚거나 차고 올라 플라이 타구를 잡아냈다 하더라도 이후 몸이 담장 밖으로 공과 함께 넘어가버린 경우에는 그대로 홈런으로 간주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아무리 홈런성이라 하더라도 파울플라이볼이 덕아웃 안에서 잡혔을 경우와 동일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말이다.

담장을 넘어가는 타구와 파울플라이는 성격상 천양지차(天壤之差)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똑 같은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한편, 대전구장처럼 기존 담장 위에 철망으로 이중담장을 설치한 구장에서 타구가 기존 담장 윗부분을 맞고 이상한 굴절 형태로 철조망을 타고 넘어갔을 때에도 과거에는 홈런으로 인정 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어림없는 일이다.

2006년 6월 6일, 심광호(30. 당시 한화 이글스)가 SK전(대전)에서 기록했던 홈런이 바로 이와 같은 형태로 담장을 넘어간 경우지만, 이러한 로컬 룰에 의한 홈런은 이제는 지나간 과거 속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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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와 포수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손윤의 야리꾸리 2008/11/26 08:36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정말 야구의 중심은 투수일까? 미리 답부터 말하면,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가 이기기 위해서는 득점을 올려야만 하기 때문에 야구의 핵심은 투수가 아닌 타자이다. 단지,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타자보다는 투수가 중요하다는 말에 불과하다. 아무리 무적의 구영탄과 같은 투수가 있다고 해도 아군이 득점을 올리지 못하면, 던지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베이스 온 볼스의 변화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9볼(1871~1879) → 8볼(1880~1881) → 7볼(1882~1883) → 6볼(1884~1885) → 7볼(1886) → 5볼(1887~1888) → 4볼(1889~ )이 된다. 결국, 변화를 보인 시기에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투수에게 유리한 규정이 새로 생겼거나 투타의 밸런스를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NL 1877 1878 1879 1880 1881 1882 1883 1884 1885 1886 1887 1888 1889 1890 1891 1892 1893 1894
BA .271 .259 .255 .245 .260 .251 .262 .247 .241 .251 .269 .239 .264 .254 .252 .245 .280 .309
HR/G .0667 .0625 .0903 .0912 .1131 .1864 .1570 .3523 .1955 .2515 .3770 .3061 .3493 .2384 .2672 .2264 .2930 .3953
R/G 5.67 5.17 5.31 4.69 5.10 5.41 5.78 5.50 4.95 5.24 6.08 4.54 5.84 5.58 5.54 5.10 6.57 7.36
ERA 2.81 2.30 2.50 2.38 2.78 2.88 3.14 2.98 2.82 3.28 4.04 2.83 4.02 3.56 3.34 3.28 4.66 5.32
SO/G 2.017 2.938 2.871 2.931 2.655 3.197 3.642 4.743 3.749 4.365 2.777 3.675 3.303 3.439 3.300 3.233 2.127 2.083
H/G 10.3 9.6 9.6 8.9 9.5 9.3 9.8 9.0 8.7 9.0 9.8 8.4 9.6 9.0 9.1 8.7 10.3 11.6
BB/G 0.958 0.989 0.791 1.088 1.537 1.420 1.419 1.992 2.073 2.396 2.690 1.924 3.401 3.500 3.444 3.354 3.912 3.661

1871년에 이루어진 변화는 바로 타자들이 지정한 높이로 공이 들어왔을 경우에는 타격과 상관없이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타자들이 불리해진 만큼 투수들에게도 핸디갭을 줄 필요로 만들어진 것이 9볼 베이스 온 볼스였다. 하지만, 1872년에는 경기 중에 사용하는 야구공의 크기를 지정하였고, 1875년에는 글러브가 보급되기 시작하는 등 투구와 수비에서 비약적이 발전을 보였고, 당연히 투고 타저 현상이 나타났다.

내셔널리그는 1880년에는 베이스 온 볼스를 9볼에서 8볼로 줄였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한 경기 평균 득점이 4점대로 떨어지는 등 투고 타저 현상이 더욱 더 강해질 뿐이었다. 결국, 내셔널리그는 초강수를 두어서, 이전까지 45피트(약 13.7m)이던 투포수 간의 거리를 1881년부터 50피트(약 15.2m)로 늘렸다.

배터리 간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일련의 조치로 1883년에는 평균 타율 0.262와 경기당 득점이 5.78 등으로 타격이 회복되었지만, 1884년에 투구폼과 관련된 규칙의 변경으로 야구에서 차지하는 투수의 비중이 월등히 높아지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볼을 허리 아래에서 던지도록 규정된 것을 어깨 높이에서 던질 수 있도록 룰을 변경하였다. 즉, 1883년까지의 투수들은 오로지 언더스로만 용인되었지만, 1984년부터는 언더스로뿐만이 아니라 사이드암이나 오버스로도 가능하게 되었다. 투수가 볼을 던지는 높이가 올라간다는 것은 보다 빠르게 던질 수 있게 되었고, 당연히 경기당 탈삼진수가 높아졌고, 또한 타자들의 타율은 급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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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887년에는 이전까지 타자들이 투수들에게 어디로 던지라고 요구할 수 있던 것을 폐지하고, 일정한 높이와 넓이의 스트라이크 존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투수들이 새롭게 정의된 스트라이크 존에 빠르게 적응한 것에 비해서, 타자들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1889년에는 리그 평균 타율이 역대 최저인 2할 3푼대로 추락하였다. 1889년에는 지금과 같은 4볼이 베이스 온 볼스가 되면서, 투수들에게 핸디 갭을 주었지만, 사사구가 늘어난 것 외에는 1892년에는 리그 평균 타율이 0.245 등에 머무르는 등 투고 타저의 큰 틀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1893년에 내셔널리그는 야구 자체에 일대 혁신을 몰고 올 결정을 내린다. 배터리간 거리를 종전의 50피트에서 지금과 같은 60피트 6인치(약 18.44m)로 늘렸다. 이전보다 무려 3.2m나 투수가 던져야 할 거리가 멀어졌다. 어떻게 보면 3.24m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것을 투수가 던진 공이 포수에게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구해 보면, 상당히 충격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구분
120km 125km 130km 135km 140km 145km 150km 155km 160km 165km
15.2m 0.4556 0.4374 0.4206 0.4050 0.3905 0.3771 0.3645 0.3528 0.3417 0.3314
18.4m 0.5516 0.5295 0.5091 0.4903 0.4728 0.4565 0.4412 0.4270 0.4137 0.4011
투구시에 한 발 내딛기 때문에 실제로 걸리는 시간은 더 짧다.  

지금과 같은 18.44m에서 투수가 155km의 공을 던질 경우에 포수에게 도달하는 시간은 0.427초 정도 걸린다. 반면에, 15.2m에서는 130km정도의 속구로도 155km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게다가, 투수들이라면 꿈의 스피드인 160km나 165km도 15.2m에서는 135km에서 140km 사이의 스피드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1893년 이전의 야구에서는 일정정도의 어깨를 가진 투수라면, 누구라도 만화 속 캐릭터들이 부럽지 않는 강속구 투수들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3.2m를 늘리는 조치로 투수들은 재앙을 맛보았다. 1894년에는 리그 평균 타율이 0.309였고, 또한 보스톤 비니터스(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휴 더피는 역대 메이저리그 최고 타율인 0.440을 기록하였다. 게다가,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4명의 4할타자를 포함해서 3할 이상을 기록한 타자를 무려 7명이나 배출하였고, 팀타율은 0.349였다.

배터리 간의 거리가 15.2m에서 18.44m로 변한 것만으로 현재 타자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쿠어스필드 이상의 파라다이스가 실현된 셈이었고, 투고 타저는 단숨에 역전되어서 투저 타고의 시대가 되었다. 결국, 배터리 간의 거리는 1880년까지는 45피트였고, 1881년부터 1892년까지는 50피트로, 1893년에는 지금과 같은 60피트 6인치가 되었다. 그런데, 왜 정확한 60피트가 아닌 6인치가 붙은 것일까?

그 답은 단순한 실수 때문이었다. 당시 내셔널리그 규칙 위원회는 정확하게 투수와 포수간의 거리를 60피트로 정했지만, 투수판 등을 설치하는 과정에 실수로 6인치가 덧붙여졌다. 6인치가 더해진 것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거리를 측정하는 측량가가 60피트 0인치를 60피트 6인치로 착각했다는 설과 또 다른 하나는 위원회에서 측량가에게 준 문서의 글씨가 해독이 필요할 정도로 난필이어서, 0인치를 6인치로 오인한 결과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던 결과적으로 위원회가 정한 규칙집의 60피트와는 6인치의 차이가 있었지만, 위원회 등은 기껏 6인치(약 15cm)정도이기에 별반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해서, 투수와 포수 간의 거리는 지금의 60피트 6인치라는 어정쩡한 숫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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