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무관심 도루 적용 기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기사를 계기로 적용 기준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관련 부분을 강조해 놓았으니, 시간 없으신 분들은 강조된 부분만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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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

[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도루왕 가는 길의 복병 ‘무관심 도루’

기사입력 2009-08-19 11:10


지난 2002년, 그 동안 사문화 취급을 받아오던 무관심 도루(정확히 말하자면 무관심 진루) 규정을 실제 적용하기로 전격 결정했을 당시, 기다렸다는 듯 많은 질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황당한(?) 질문이 하나 있었으니….

도루왕 타이틀이 걸린 선수간의 경쟁에서 상대가 무관심 도루 규정을 역이용해 악용할 경우, 이를 어떻게 분별할 것이며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지가 질문의 핵심이었다.

상상화를 그려보면, 도루부문 1, 2위를 다투고 있는 선수가 소속 팀간의 경기에서 특정 팀이 도루경쟁 중인 상대 선수의 도루 행위에 대해 고의로 무관심한 척, 주자를 묶어두지도 않고 다음 루를 향해 뛰었다 하더라도 아예 송구조차 하지 않는 등의 방임성 플레이를 했다는 가정을 놓고 하는 말이었다.

당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이와 같은 질문에 속 시원한 답을 내놓기가 다소 막막한 구석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답이 없지는 않았다.

무관심 도루 적용에 있어 그 기준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기저를 이루고 있는 한 가지 대전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물 건너간(?) 경기에 적용되는 규정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점수차가 크더라도 경기 중반 이전에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8회나 9회가 된다.

상대가 아무리 고의로 주자견제를 태만히 하고, 뛰어도 모르는 체 고개를 돌렸다 해도 당시 점수차나 이닝 등의 경기상황이 정상적이었다면 무관심 도루의 적용은 없다고 보면 된다.

물론 무관심 도루의 적용여부는 선수들의 플레이 형태에 따라 그 판단이 크게 좌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1루수가 1루주자를 묶어두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 정상적인 수비위치를 잡고 있었을 경우가 우선 무관심 도루 대상으로 고려된다. 그리고 다음은 포수의 견제동작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이며, 마지막으로 주자가 향하고 있는 다음 루에 수비수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을 때에도 무관심 도루 적용 대상이 된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상황이 한꺼번에 모두 나타났다면 100% 무관심 도루가 적용된다. 그러나 한 가지 또는 두 가지 상황만 일어났다면 약간의 추가적인 생각이 필요하다.

지난 8월 6일 잠실에서 열렸던 LG와 KIA의 경기에서 도루부문 선두를 달리고 있는 LG의 이대형은 팀이 6-11로 뒤지고 있던 9회말 1사 2루 상황에서 3루를 훔쳤지만 무관심 도루로 기록된 적이 있다.

당시 이대형이 3루로 향할 때 포수 김상훈(KIA)이 일어나 공을 던지려는 시늉을 하긴 했지만, 투수가 전혀 견제할 생각이 없었다는 점과 3루수 박기남이 이대형을 쫓아 들어가지 않았다는 장면이 반영돼 무관심 도루로 기록된 것이었다.

그러나 전광판에는 이대형이 3루로 들어가자 도루임을 알리는 애니메이션이 작동되었고, 이를 통해 당연히 도루로 기록된 것으로 알았던 LG는 이대형의 도루기록이 인정 받지 못한 것을 알고 부랴부랴 사실확인에 나서야 했고, ‘무관심 도루의 기준은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또 한번 도마 위에 올라야 했다.

말 나온 김에 설명을 첨가하자면 앞서 말한 수비수의 플레이상 형태 말고도 몇 가지의 기준이 더 존재한다.

우선 1사나 2사 때 풀카운트(2-3)에서는 밀려가는 주자(포스 상태)의 뜀박질에 대해서는 무관심 도루로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이는 루를 훔치려는 의도로 보기보다 팀 플레이에 의한 자연스러운 주루현상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타자가 헛스윙해 삼진을 당하고 주자는 살았다면 무조건 도루다.

또한 지나친 무관심 도루의 폭증과 남발을 막기 위해 일정 점수차 이내(대개 3점차 정도) 상황에서의 진루 행위에 대해서도 역시 무관심 도루 적용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한편 지금까지 무관심 도루가 기록된 전례를 뒤져보면 그 해 도루 1위에 올랐던 선수에게 무관심 도루가 기록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2002년 김종국 이후 이종범(2003)-전준호(2004)-박용택(05)-이종욱(2006)과 2007년부터 2년 연속 도루 1위에 올랐던 이대형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공통된 현상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대도들은 아무 때나 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그 동안 도루부문 타이틀을 놓고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기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2년 이후 1, 2위간 격차가 가장 근접했던 해는 2005년의 박용택(LG, 43도루)과 윤승균(두산, 39도루)으로 ‘4개’ 차이였다.

하지만 올 해는 근년 들어 그 어느 때보다도 도루왕을 가운데 둔 뜨거운 질주경쟁이 벌어질 듯한 분위기다. 8월 18일 현재 43개로 도루부문 3연패를 향해 매진하고 있는 이대형의 뒤를 정근우(SK)가 불과 3개 차로 바짝 뒤쫓고 있다.

막바지에 접어든 지금, LG와 SK가 남겨둔 경기는 양 팀 모두 똑 같은 22경기. 아직까지는 이대형이 유리해 보이지만 도루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출루율에서 정근우(.421)가 이대형(.340)에 비해 무려 1할 가까이 앞서있다는 점은 섣부른 예측을 불허한다.

이제 도루왕을 놓고 LG와 SK가 맞대결을 벌일 수 있는 시즌 잔여 경기수는 단 3경기뿐이다. 구체적인 잔여경기 일정이 아직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모두 9월 이후에 벌어질 예정이다.

이쯤에서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남은 두 팀간의 경기가 한 팀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양새가 아니라 끝까지 접전으로 이어져 주길 바랄 뿐이다. 그래야만 무관심 도루가 도루왕을 향한 두 선수의 발목을 잡는, 혹시라도 있을 불상사(?)를 미리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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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의 꽃' 유격수, 하일에서 박기혁까지

기사입력 2009-02-25 07:32 기사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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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왕년의 롯데 에이스, 김청수를 만나다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프로스포츠나 학원스포츠에서 감독직을 수행하기도 어렵지만, 코치직에 대한 수행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고교야구에서 전체 게임 판도를 정하고 큰 밑그림을 그리는 것은 감독이지만, 선수들의 세부적인 움직임 하나 하나를 보살펴 주는 것은 코치들의 몫이다. 또한 많은 선수들을 하나하나 보살피는 것도 감독이 해야 할 일이지만, 이를 보조하는 코치들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 '야구 명문'으로 유명한 부산고등학교 전경

이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을 그라운드에 두고 펑고(fungo)를 쳐 주는 일, 프리배팅을 위한 공을 던져주는 일을 포함하여 제자들을 위한 '굳은 일'은 보통 감독이 아니라 코치가 직접 해 주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과 직접 살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은 감독이 아니라 오히려 코치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부산고등학교 김청수 코치는 경기 전 제자들의 상태를 일일이 점검하고 몸소 배팅 볼을 던져주거나 펑고를 쳐 주는 일을 절대 마다하지 않는 '열혈 수석코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성장 과정에 보람을 느끼며, 성적보다는 선수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야구인이기도 하다. 특히, 14일 천우스포츠배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부산고가 광주일고에 4:8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1패보다는 선수들의 기량 성장에 더 큰 점수를 주는 모습도 보였다.

이렇게 제자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 김청수 수석코치를 14일 경기 후 부산고등학교 그라운드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첫 만남과 현역 시절 이야기

Q : 오늘(14일) 경기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단 아직까지 '선수 김청수'로서 코치님을 기억하는 팬 여러분들께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김청수(이하 '김'으로 표기) : (웃음) 저보다 야구 잘하는 선수들도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기억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죠. 그리고 제가 팬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은 지금은 제가 부산고등학교에 있지만, 어디에 있건 간에 성실하고, 팬들에게 한 발짝 이라도 다가갈 수 있는 좋은 선수를 만들어서 (프로에) 보내는 것이 제가 팬들에게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화답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Q : 옛날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롯데 자이언츠에 1차 우선지명으로 프로에 입문하셨는데, 방어율을 비롯한 성적이 신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그 당시 추억을 떠올리신다면요?

김 : 추억이라… 아무래도 좋은 추억보다는 그렇지 못한 기억이 많았죠(웃음). 제가 1989년신인 시절에 15패를 했어요. 그런데 그 중간에 0:1로 진 경기가 세 번이었고, 1:2로 진 경기도 세 번 정도였어요. 시즌 초반에 패배 숫자가 많았지만, 방어율은 2점대였죠. 이러다보니 첫 승은 7월 24일에야 가능했습니다. 결국 첫 해에 제가 7승을 했습니다(주 : 김청수 코치는 1989년, 방어율 3.38, 7승 15패 5세이브, 10완투, 210 1/3이닝이라는 빼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Q : 신인이 프로에서 7승을 거두기란 지금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박정현(당시 태평양 돌핀스. 1989년 신인왕) 선수만 아니었다면 신인왕도 가능하셨을 텐데?

김 : 당시 어우홍 감독님께서 저를 참 예뻐하셨어요. 그래서 1989 시즌을 앞두고 부산 KBS 프로그램에 쟁쟁한 선배님들을 제치고 제가 출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때문에 몇 번 NG가 났었습니다. 그 이유가 '프로에서의 각오'를 묻는 질문에 (방송 관계자들은) 저에게 '신인왕이 목표다'라는 답변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프로그램에는 제 생각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 (신인왕이 목표가) 아니다. 나는 김청수라는 이름이, 우리 팀에서 필요로 하는 선수가 되어야 신인왕이고 뭐고 할 것이 아니냐 " 고 답변을 했어요. 이 때문에 몇 번이나 NG를 냈습니다(웃음). 결국 나중에 감독님이 " 야, 이놈 고집 한 번 세네. 그냥 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Q : 현재 부산고 감독이신 김민호 감독님과도 롯데에서 한솥밥을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김 : 맞습니다. 그때에는 감독님이 4번을 치셨고, 저는 감독님을 '형'이라고 부르면서 지냈죠. 그런데 김민호 감독님께서 제가 등판하는 날이면 으레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하셨어요(웃음). 그래서 심지어는 " (김)청수 던지는 날에는 나를 (타선에서) 빼 달라 " 는 소리까지 하셨어요. 그런데 그 다음 해인 90년도에 제가 던지는 날에는 김민호 감독님이 4타수 2안타도 치면서 맹타를 휘두르기 시작하셨어요. 그러면서 " 작년(1989)에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다 " 라고 말씀하셨지요.

에피소드라고 말하기엔 조금 민망하지만, 신인 때에는 정말로 야구하기 싫었습니다(웃음). 지금은 MBC ESPN 해설을 하고 계시지만, 허구연 당시 투수코치님이 맥주 반 잔도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대전 원정경기에서 밤에 저를 부르시더니, 술을 한 잔 따라주시더군요. 저는 술을 좀 하는 편이었습니다. 술을 한 잔 하시면서 (허구연) 코치님이 하시는 말씀이 " 너에게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하는데, 마땅히 해 줄 말은 없고, 딱 한 마디만 할게. 청수야!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참 흔한 말이지만, 지금 네 상황에서는 그것이 가장 맞는 말인 것 같다 " 라고 하시더군요. (승리 숫자에 비해 패배 숫자가 많아) 야구를 한다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많았지만, 나름대로 제 마음을 다 잡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조언해 줄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힘들었을 때의 경험'을 접목시켜서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면 (제자들이) 곧잘 힘을 내지 않겠습니까?

▲ 김청수 코치는 현역시절 에피소드와 코치로서 바라보는 학생야구 이야기를 가감 없이 풀어냈다.

이것이 학생야구의 매력!

Q : 은퇴 이후 중학야구 감독을 거쳐 현재 고교야구 수석코치로 자리잡으셨는데, 김청수 코치님께서 생각하시는 고교야구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김 : 고교야구는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실수가 많습니다. 영글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은 선수들이 많은데, 이러한 선수들이 실수 속에 성장하는 것이 고교야구의 큰 매력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이러한 과정 속에서 보람을 찾지요. 가르치는 입장에서 '오늘 비록 못했지만, 성장하는 속도가 눈에 보일 때'에 큰 재미를 느낍니다. 그 재미로, 그 보람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엊그제(12일) 경기에서 개성고에 0:10으로 패한 것도 2루수들이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경기 이후 (2루수를 봤던) 제자들을 모아 놓고 내야 펑고를 많이 쳤어요. '실수하면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고 2시간 동안 한 1,000번은 쳤던 것 같습니다. 자식 같은 제자들인데, 안쓰럽기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 힘들다고 중단하면 과연 그것이 득일까 실일까 싶었습니다. 나중에는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펑고를 받아냈는데, 연습의 결과는 확실히 오늘(14일) 경기에서 드러났습니다. 2루 쪽으로 어려운 타구가 7개 정도 갔는데, 무난히 잡아서 처리했죠. 이러한 성장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고교야구의 큰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Q :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오늘(14일) 경기를 100점 만점에 몇 점 주고 싶으십니까?

김 : 사실 평상시 게임을 생각해 본다면 오늘 경기에서 광주일고 상대로 4:8로 패한 경기는 40점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요 근래 성장하는 속도를 봐서는 100점을 주고 싶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눈에 띄게 야구하는 실력이 늘고, 야구하고자 하는 의욕도 증가했기 때문에 100점 만점, 아니 그 이상을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선수들에게 하지는 않습니다(웃음). 경기 결과에 만족하여 안주하면 안 되니까요.

Q : 김민호 감독님 아들(김상현, 동국대 2학년)도 제작년에 부산고등학교 멤버로 활약하면서 부자가 나란히 한 학교에서 활약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김 : 그랬습니다. 아쉽게 프로에 못 갔지만, 이는 어깨가 좋지 않아서 그랬던 측면도 있습니다. '아버지만큼의 선수가 되었으면' 더 없이 좋겠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부상으로 어깨 수술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한 것 같습니다. (김)상현이가 수술받는 그 날, 저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아직까지 지우지 않고 있습니다. '(어깨수술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라고 보냈는데, 저 역시 '나 네가 보낸 문자 안 지웠다. 네가 성실성을 잃으면 이것을 보여 줄 것이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영원히 지우면 안 되겠죠(웃음).

Q : 다음 달이면 전국의 고등학교 야구부가 한 자리에 모이는 '황금사자기 전국대회'가 열립니다. 소속팀 부산고등학교,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의 성적을 올릴 것으로 보십니까?

김 : 작년에는 외부에서 평가하는 저희 학교 전력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우승까지 가능하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결국 우승은 못 했습니다. 이것이 야구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작년같지 않아서 외부에서 저희 학교 전력을 상당히 낮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년에도 그랬듯이 외부 평가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외부에서 평가하는 것보다 최소 두 경기는 더 이길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잠재력 있는 선수들이 많으니 의외의 결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현장에서 듣는 학원스포츠의 애로사항

Q : 이번에는 조금 원론적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현장에서 느끼는 학원스포츠의 애로사항은 무엇입니까?

김 : 아무래도 학원스포츠는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크죠.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력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힘들다고 봅니다. 그나마 부산고등학교는 동창회 지원이 넉넉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선수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적다고 생각합니다. 해줄 때에는 더 해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가 공부에 대한 문제입니다. 부산고등학교는 1주일에 두 번씩 (대학교) 영문학과 학생들을 불러 영어 공부를 시킵니다. 지금 몇 개월째 야간 훈련 안 하고 (영어 공부를) 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다만, 선수들도 야구 이전에 학생인데, 공부를 하지 않은 부분은 저도 지나고 보니까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이 수업을 상당히 강조하십니다. 감독님께서 " 내가 수업을 들어가라고 지시하면, 무조건 들어가라. 수업을 빼먹으면, 그 때에는 야구방망이가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금전문제, 학습문제)는 학원스포츠에서 조금 더 관심을 갖고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Q :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후배 야구선수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

김 : 저희 선수들을 포함하여 모든 선수들이 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프로에 입문하면 누구나 스타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스타, 슈퍼스타는 그야말로 한 두명에 불과합니다. 힘들더라도 대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잊지 말고 거기에 맞춰 항상 노력하는 선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서는 마음이 흐트러져 구설수에 올라 '스포츠면'이 아닌 '사회면'에 등장하는 일부 선수들이 있는데, 저는 후배들, 제자들이 야구를 못 하더라도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를 지키는, 그런 선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후배들이) '사람다운 야구선수'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미가 묻어나는 선수가 되어야 합니다.

※ 김청수는 누구?

마산중학교 ? 마산상업고등학교 ? 동아대학교를 거쳐 1989년 신인 1라운드 우선지명으로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왕년의 에이스'다. 신인 첫 해, 38경기에 등판하여 210과 1/3이닝동안 완투 10회를 포함하여 방어율 3.38, 7승 15패 5세이브를 기록하여 당시 태평양 돌핀스의 신예 박정현과 신인왕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1990년 11승, 1991년 10승 등 롯데 마운드의 중심축이었던 그는 샌디 쿠펙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짧고 굵게' 선수시절을 마감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94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통산 방어율 3.89, 31승 38패 8세이브, 262 탈삼진을 기록하였다. 구위에 비해 승운이 없었던 것이 다소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은퇴 이후 중학야구부 지도자를 거쳐 현재는 부산고등학교 야구부 수석코치로써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매력에 푹 빠졌다는 김청수 코치는 " 다음에는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 면서 제자들을 향한 무한한 신뢰를 숨기지 않았다.

엑스포츠뉴스 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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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미스터가 간다] ①묻지도 따질수도 없는 ‘완벽 투구폼’

[JES 김식] 류현진의 슈퍼 체인지업

김광현의 '12 to 6' 커브 ③슬라이더의 달인 윤석민 ④봉중근의 드롭, 장원삼의 템포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이 14일 소집된다. 2006년 1회 대회 4강 신화를 재현할 동력은 단연 젊은 투수들이다. ESPN은 WBC 참가국 중 한국의 선발진을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박찬호(필라델피아) 서재응(KIA) 등 1회 대회 주축 선발투수들이 빠졌지만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주역들이 선배들 의 빈자리를 메운다. 류현진·김광현·윤석민·봉중근·장원삼 등은 최소 5년, 길면 10년 이상 대표팀 마운드를 책임질 주인공이다. 일간스포츠(IS)는 대표팀의 양상문 투수코치와 중심타자 김태균(한화)의 도움을 받아 '골드미스터가 간다' 시리즈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양상문 대표팀 투수코치는 류현진(22·한화)을 " 가장 중요한 경기, 이를테면 중요한 대회 결승전에 내보낼 투수 " 라고 평가했다. 투수에게 필요한 여러가지 덕목을 고루 갖췄다는 의미다. 양 코치는 " 프로에서 세 시즌을 뛰었을 뿐이지만 현진이는 어느 베테랑 못지 않게 노련하다. 신인 때부터 그랬다 " 고 말했다.

▶투구폼의 모범답안

류현진의 폼은 흠 잡을 데가 없다. 군동작 없이 중심이동이 진행되고 공을 놓는 타점도 높다. 오른쪽 어깨→왼쪽 어깨→왼쪽 팔꿈치까지 수평을 이룬 상태에서 공을 던진다. 운동에너지 손실이 거의 없다. < 그래픽 참조 >

양 코치는 " 다른 투수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폼이다. 류현진은 체중을 90% 이상 활용할 줄 안다. 중심축이 살아있고 어깨 각도가 좋아서 전력투구 하지 않아도 공에 힘이 붙어 있다 " 고 설명했다.

이어 양 코치는 " 키 큰 좌투수가 투수판의 1루쪽 끝을 밟고 오버스로로 내리 꽂으면 이상적인 투구 궤적이 나온다. 몸쪽·바깥쪽으로 볼을 던진 것 같아도 스트라이크존 끝에 살짝 걸치게 된다 " 고 덧붙였다. 좌타자는 물론 우타자도 류현진의 공을 제대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완급 조절 '2X2 기어'

류현진은 2006년 프로 입단 후 서클 체인지업을 본격적으로 배웠는데, 이미 국내 최정상급이다. 직구를 던질 때와 똑같은 폼에서 나온 공이 마음 먹은대로 떨어진다. 양 코치는 " 류현진의 서클 체인지업이 미주쪽 타자들에게 특히 잘 통한다. WBC 2라운드에서 큰 위력을 발휘할 것 " 이라고 전망했다.

체인지업은 류현진 피칭의 핵심이다. 류현진의 직구 구속은 시속 142~152㎞를 오간다. 상황에 따라 강약 조절을 하기 때문에 여느 투수보다 편차가 큰 편이다.

투구폼도 빠를 때가 있고 느릴 때가 있다. 여기에 체인지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 타자들은 타이밍 맞추기가 더 어려워진다. 양 코치는 " 류현진은 폼으로 한 번, 구종으로 또 한 번 완급 조절을 하는 투수 " 라고 표현했다.

▶팔꿈치 상태는 걱정

물론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와이 훈련 중인 류현진은 " 아픈 곳이 없다. 전체적인 컨디션도 좋다 " 라고 자신하고 있지만 왼쪽 팔꿈치가 염려스럽다.

류현진은 동산고 시절이던 2004년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은 뒤 신인으로서 투수 3관왕에 올랐던 2006년 괴력을 발휘했다. 이후에는 뛰어난 완급 조절과 소속팀의 배려(등판 후 5일 휴식)로 구위를 유지하고 있다.

양 코치는 " 팔꿈치 상태가 완전하진 않겠지만 류현진은 이미 그런 상황을 이겨낸 투수다. 가장 중요한 경기엔 류현진이 투입될 것 " 이라고 전망했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Tip=김태균이 본 류현진

" 류현진과는 개인적으로 아주 친하다. 그렇지만 마운드에 선 현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 속을 알 수 없는 친구다. 투수와 타자로서 만난다면 어떨지 잘 그려지지도 않는다. 현진이가 투구하는 걸 보면 참 영리하게 완급 조절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직구가 좋은데도 힘을 넣었다 뺐다 한다. 여기에 체인지업까지 잘 던지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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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아마야구 괴물타자'였던 그, 추성건을 만나다

▲ 서울고교 야구부 선수들과 추성건 코치

[엑스포츠뉴스=유진 기자]

" 자세가 어정쩡하잖아! " , " 집중하란 말이야! " , " 좋아 좋아! " , " 각 포지션 위치로! "

일찌감치 학생들이 하교를 마친 서울고등학교 교정은 매우 조용했다. 그러나 '고요속의 외침'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일까. 유난히 넓디 넓은 운동장에서만큼은 '따악' 하고 배트로 공을 치는 소리와 '파이팅'을 외치며 선수들을 독려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그리고 배트 박스에는 예사롭지 않은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직접 펑고(fungo)를 쳐 주는 코치가 있었다. 싫은 내색 없이 다양한 방향으로 타구를 보내는 그 사람 - 한때 아마추어 괴물타자로 불렸던 그 - 바로 추성건이었다.

어지간한 야구팬들이라면 추성건이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대학야구의 간판타자로서 주요 신문사 야구기사 타이틀에 추성건의 이름을 직접 본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비록 프로무대에서는 제 실력을 뽐내지 못했지만, 야구천재들만이 모여 있는 89학번 타자들 중에서 그는 단연 돋보였다. 또한 건국대학교 4학년 시절, 톱 타자 이종범(KIA 타이거즈)과 콤비를 이룬 추성건은 1992년 대학야구에서 모교에 유일한 2관왕을 안기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안타까운 선수'라는 말을 많이 한다. 실제로 그는 야구 재능에 비해 프로무대에서 자신의 역량을 크게 펴지 못했다. 아까운 선수였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절대 '실패한 선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고교야구에서 우수한 지도력을 겸비한 코치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2002년 프로무대 은퇴 이후 모교로 돌아간 그를 서울고등학교 교정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첫 만남, 그리고 현역시절 이야기

Q : 우선 해외(중국) 전지훈련 다녀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추성건 선수를 잊지 못하는 팬 여러분들께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추성건(이하 '추'로 표기) : (웃음) 2002년 은퇴 이후 잊혀진 사람인데,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많다니 참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Q : 옛날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1992년도에 건국대학교는 대학야구에서 유일한 전국대회 2관왕을 차지했습니다. 그때 상황을 이야기 해 주십시오.

추 : 제가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팀의 주장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4학년이었던 1992년 전반기에 팀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서 주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상당히 컸죠. 그런데 당시 전국대회 첫 우승의 순간이 너무 감격적이었습니다. 그때 고비가 준준결승 이었는데, 상대는 신재웅(現 공주중학교 감독) 선수가 버티고 있던 경성대학교였습니다. 당연히 신재웅 선수가 선발로 나섰죠. 그런데 팀이 9회말 투 아웃까지 1:9로 지고 있었습니다. 아웃카운트 하나만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주자도 없었는데, 우리(건국대)가 10:9로 역전을 했지요(웃음). 준준결승에서 힘겨운 시합을 이기고 나니, 준결승은 비교적 쉽게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결승전은 조금 어려웠지요. 당시 고려대학교를 만났는데, 연장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우승트로피는 결국 우리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우승을 했던 대회에서는 연세대학교와 결승전에서 맞붙었습니다. 경기 양상은 팽팽했지만, 9회말에 제가 결승 홈런을 기록함으로써 끝이 났었습니다(웃음).

무엇보다 당시 건국대학교 야수 구성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이종범을 비롯하여 송태일(은퇴), 이영우(한화 이글스), 장재중(은퇴) 등 호화 멤버들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건국대학교가 승승장구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Q : 당시 추성건 선수를 포함한 89학번에는 천재 선수들이 많았는데, 특별히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선수가 있었다면요?

추 : 김경환을 포함하여 구대성, 이상훈 등 대학무대에서 돋보적인 투수들이 많았고, 대학졸업 이후 상무에서 실력이 일취월장한 마해영 선수도 있었죠. 그러나 솔직히 그때 당시에는 특별히 상대하기 어려운 선수가 없었습니다(웃음). 그 만큼 타석에 들어서면 자신이 있었지요.

Q : 결국 그러한 자신감이 대학무대를 평정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결국 대학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93년 신인 1차 지명에서 OB 베이스(現 두산 베어스)가 추성건 선수를 뽑았어요.

추 : 솔직히 저는 1차 지명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팀에 합류한 이후 1993년과 1994년은 프로에 적응하는 단계였지요. 2년간의 적응을 마친 후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1995 시즌 시범경기에서 제가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했죠. 그런데 개막전에서 손목을 다쳐버렸습니다. 결국 재활에 매달려야 했고, 노력 끝에 7월에 다시 그라운드에 설 수 있었습니다. 복귀 첫 경기가 광주 원정경기였는데, 첫 타석에서 홈런을 기록하는 등 페이스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홈런 친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이번엔 발목 부상을 당했습니다. 결국 다시 2년간의 재활과정을 거쳐야 했죠. 공교롭게도 그날 광주 원정경기가 김성한 감독(前 KIA 타이거즈)님의 은퇴경기였습니다(웃음).

그런데 팀은 1995년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때 저도 현장에 있기는 있었는데, 발목에 깁스를 하고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경기를 봤지요(웃음).

Q : 이후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셨어요.

추 : 그렇습니다. 그런데 1997년에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를 했는데, 그것 참… 적응이 잘 안 되더군요. 더군다나 당시 팀에 우즈가 투입된 이후부터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99년에 신생팀 SK로 유니폼을 바꿔 입었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OB 베어스에서 저로 인하여 상당히 마음이 아팠을 겁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선수들을 가르치지만, 그때 인연들이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기록적인 사항보다는 사회적인 유대관계가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Q : SK 와이번스에서는 그래도 나름대로 좋은 활약을 펼치셨는데, 두 구단(두산과 SK) 각각의 특징이 있다면요?

추 : OB 베어스는 전통적으로 체계가 잡혀 있는 팀이었어요. 반면 SK 와이번스는 당시 신생팀이다 보니 처음 1~2년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죠. 그런데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프로무대에 자리를 잘 잡은 것 같습니다. 제가 SK에서도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 지금까지 지인으로 지내는 것을 보면 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SK에서는 3루수로 보직을 변경하기도 했죠. 그리고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습니다. 잘 했지만, 2000년 이후 다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은 모두 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다 보니 혈압으로 쓰러질 때도 있었거든요(웃음).

Q : 2002년에 서른 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셨는데, 많은 이들이 참으로 안타까워 했어요.

추 : 결국 부상이 가장 크지 않았나 싶어요. 제가 대학에서부터 프로 입문까지 아파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아프면 세상이 바뀝니다(웃음). 일부에서는 김형석, 김종석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존재가 출전 기회를 막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셨는데, 절대 그렇지는 않습니다. 김인식 감독(한화 이글스)님께서도 저에게 기회를 많이 주셨으니까요. 다친 것이 가장 컸습니다.

제가 SK에서 방출되고 나니까, 김성근 감독(당시 LG 트윈스)님께서 2002 시즌을 앞두고 같이 뛰어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정말로 그라운드에서 직접 야구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모교인 서울고교로 왔습니다.

▲ 제자들에게 직접 펑고(fungo)를 쳐 주는 추성건 코치

모교 야구부 코치시절과 중국리그 진출

Q : 모교인 서울고교로 돌아오신 계기가 있으시다면요?

추 : 그 전부터 와 달라는 연락은 꾸준히 받았습니다. 당시 코치셨던 백기성 감독님께서 " 같이하자 " 고 제안하셔서 두말 없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1988년에 모교 야구부 주장을 맡았기 때문인지 모교에 대한 애착도 컸습니다. 일단 서울고교 야구부는 선배님들의 지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그에 의지하는 바가 큽니다.

Q : 이후 잠시 중국야구를 경험하셨죠?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듣기로는 중국에서 내야수로도 뛰셨다는데?

추 :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닙니다. 제가 선수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북경에 '희망팀'이라는 야구단이 있었는데, 이 팀에 이용호와 이준, 두 선수가 나란히 선수로 뛰었을 뿐입니다. 저는 (광동 레오파스) 기술 감독직을 맡았죠. 그런데 제가 가르친 선수 중 중국 야구 국가대표를 네 명이나 배출했습니다. 천쥔이, 리유카이, 지아더롱, 쟝홍보(이상 광동 레오파스) 등 네 선수가 제 손으로 키워 낸 제자들입니다(웃음). 그래서 중국 야구협회장도 저를 인정해주었죠.

이 때의 인연을 바탕으로 서울고교 해외 전지훈련을 중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중국 프로리그의 인프라는 여전히 열악합니다. 그러나 중국 야구협회가 중/장기적인 목표를 세워놓았기 때문에 장차 많이 발전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 중국 6개 프로구단이 모두 일본 프로팀과 자매결연을 맺고 우수한 선수를 일본으로 연수시키거나 일본 코치들이 중국으로 지원을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미즈노가 프로리그를 후원하고 있으니, 중국리그의 앞날이 밝은 것만은 틀림 없습니다.

Q : 중국리그 경험 이후 다시 모교로 돌아오셨습니다. 복귀 이후 많은 대회에 출전하셨는데, 일단 저는 2007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이형종(現 LG 트윈스) 선수가 역투한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추 : 그것 참… 너무 아쉬운 경기였습니다. 2007년도에는 저희가 전국체전에서 우승할 만큼 전력이 탄탄했거든요. 팀 타율이 4할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전국 각지의 강호들을 왠만하면 콜드게임으로 끝냈죠(경남고교, 신일고교 등).

그런데 (이)형종이보다 정찬헌(現 LG 트윈스)이 먼저 마운드에서 강판됐어요. 마운드에서 물러나 1루수로 교체됐는데, 제가 1루에 (베이스 코치로) 나가있다 보니까 선수들 면면이 다 보이잖아요. 그때 (정)찬헌이가 표정 변화 없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군요. (이)형종이보다 (정)찬헌이가 먼저 울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표정 변화 없는 정찬헌 선수를 보고 나니 '이 친구, 참 괴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두 선수 모두 프로 입단 첫 해에는 제 모습을 찾지 못했죠. 제 생각에 아마야구에서 명성을 날린 투수라 해도 1~2년간은 프로무대에서 고생해야 제 모습을 찾는다고 생각합니다. 야수의 경우는 3~4년이 필요하죠. 변화에 대한 적응이 필요합니다.

Q : 이번엔 조금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현장에서 느끼는 학원스포츠의 애로사항이 있으시다면요?

추 : 고교야구장은 전쟁터입니다. 왜냐? 고교야구에서 3학년이 되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프로입단, 대학진학, 야구포기가 그러한데, 일단 프로에 지명될 확률이 가장 낮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야구를 포기하는 비율이 50:50 정도로 비슷합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오전 4교시 수업을 의무적으로 듣고 오후부터 연습하는 구조는 고등학교가 아닌 유소년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야구밖에 모르는 아이들에게 성적이나 진학 등 선택권의 폭을 넓혀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코치들이나 감독님이 이러한 지도를 해야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선수들이 잘 따라주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저는 솔직히 야구를 늦게 시작했어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했으니까요. 그런데 믿으실지 모르시겠지만, 저는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전교에서 1~2등을 다투는 수재였습니다(웃음). 학력고사 시절에 186점(200점 만점)을 맞았는데, 그때 코치님들이 " 얘 누구냐? " 라고 말씀하시면서 깜짝 놀라셨죠. 그런데 제가 '야구라는 것이 이것이다' 라고 느꼈던 시기가 나이 서른때였습니다. 만약에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면, 야구를 깨우치는 시간이 빠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Q : '나의 모교 서울고교', 전국대회 우승을 자신하는 요인이 있다면요?

추 : 팀워크가 상당히 좋습니다. 일단 첫 대회인 황금사자기 4강 안에 들기만 하면 우승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최근에 우승한 대회가 2007년 전국체전인데, 이번만큼은 고교 3대 야구선수권에서 우승을 한 번 해 보고 싶습니다. 모교 우승이 최 우선 과제죠.

Q : 마지막으로 후배 야구선수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추 : 요즘 선수들이 덩치는 큰데, 정신력은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특히, '목표의식'을 갖고 있는 선수가 드뭅니다. 또한, '안 되면 부모가 해 주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선수들이 적지 않은 것도 문제입니다. 예전보다는 젊은 선수들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전하고 밝은 모습으로 야구하는 것은 칭찬해 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세계 청소년 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보면 열악한 인프라에 비해 참으로 야구 잘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견이지만, 이는 전 세계 지도자들보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야구를 잘 가르치기 때문이라 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날씨 추운데도 불구하고, 눈 오는데도 불구하고 야구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뿐입니다. 이런 것을 감수하고 야구를 가르치는 일선 지도자들의 고생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젊은 선수들과 후배들이 이러한 점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부천 고등학교와 연습 경기를 앞두고 진지하게 배팅 연습에 임하는 서울고교 선수들

[정리=엑스포츠뉴스 유진 기자]

※ 추성건은 누구?

90년대 초반, 아마야구 괴물타자로 군림했던 대형 1루수였다.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건국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천재들의 집합'인 89학번 타자들 가운데서 단연 으뜸이었다. 당시 89학번으로는 투수 이상훈이 가장 돋보적인 존재였으며, 이종범, 마해영, 구대성, 김홍집, 손차훈, 김경환 등이 건제했다.

마해영은 프로 입문 이후 260 홈런을 기록하는 등 프로무대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적어도 아마시절에는 추성건이 단연 '낭중지추'였다. 특히, 건국대학교 시절 동료 이종범과 짝을 이뤄 일궈낸 1992년 대학 야구 선수권대회 2관왕은 그의 진가를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이에 추성건은 1993년 신인 우선 지명에서 OB 베어스에 지명되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대학 최대어인 이상훈의 LG 트윈스행이 결정되자, OB 베어스는 2순위인 추성건을 두말없이 데려갔다.

그러나 추성건은 프로무대 데뷔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손목과 팔목 부상으로 인하여 아마시절 괴물타자로써의 위용을 뽐내기 어려웠던 추성건은 1999 시즌을 끝으로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화위복이 됐다. 이적 첫 해인 2000년, 생애 첫 3할 타율을 기록하며 서서히 살아났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2001 시즌에 23경기 출전에 그쳤던 그는 2002년 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하며, 모교인 서울고교의 부름을 받았다.

서울고교 코치를 시작으로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한 추성건은 한때 중국에서 지도자 생활을했다. 광동 레오파스에서 그의 지도를 받은 네 선수가 올림픽 국가대표에 선임될 만큼 '지도력'에 있어서 큰 점수를 받았다. 이후 다시 국내로 돌아 온 추성건 코치는 현재까지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힘을 쓰고 있다.

엑스포츠뉴스 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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