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민, 나는 야구선수였다

2007/11/21 18:14
조성민, 나는 야구선수였다
심현석 기자(hssim@sports2.co.kr) / 2007-11-20




올해를 끝으로 유니폼을 벗게 된 조성민은 야구선수로 남고 싶어한다.
사진 김재현


친구였던 박찬호에게 느끼는 배신감
일본이 아닌 미국에 갔더라면
부부 일은 당사자만 아는 거다


언제부터인가 조성민의 이름 앞에는 ‘풍운아’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풍운아의 사전적인 의미는 ‘좋은 때를 타고 활동하여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지만 요즘에는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의 의미로 바뀌어 쓰이는 게 일반적이다.

‘야구선수 조성민’은 세상에 두각을 나타냈고 ‘야구인이 아닌 조성민’은 세상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올해를 끝으로 유니폼을 벗게 된 조성민은 야구선수로 남고 싶어 한다. 영광과 좌절을 뒤로 한 채 조성민이 지난 20년의 시간을 떠올리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성민은 약속장소에 먼저 나와 있었다. 약속시간은 오후 2시. 시곗바늘은 오후 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얀색 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조성민의 얼굴은 밝았다.

키가 190cm를 넘는 한국인은 흔치 않다. 조성민의 키는 194cm다. 멀리서도 그는 한눈에 들어왔다. 11월 8일 서울 압구정동의 M카페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조성민”이라고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 조성민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조성민의 목소리만 들렸다. “이사 잘했냐. 목소리가 피곤하네. 넌 뭐 연락 없어? 인터뷰 중이니까 다시 전화할게.”

카페 M

친구의 전화인가.

(백)재호다. 챙기는 후배가 재호 한 명밖에 없다.

한국시리즈를 봤나.

2승2패까지 봤다. 시리즈 일정을 잘 몰라 월요일에 쉴 줄 알았는데. 5차전 이후에는 보지 못했다.

한화가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해 아쉽지 않았나.

내가 뛴 것도 아닌데. 솔직히 아쉽지 않았다.

올해 한화 노장투수들의 투구는.

올시즌은 확실히 구위가 많이 떨어졌다. (송)진우 형은 스피드가 아닌 제구력으로 승부했는데 타자들이 스트라이크존에서 조금 빠지는 공에는 손을 안 대니까 불리할 때가 많았다.

겨울 캠프 때도 아파서 공도 많이 못 던졌고. 그래도 베테랑답게 팀에 보탬이 되는 투구를 했다.

노래와 색소폰 연주 실력이 상당하다.

색소폰은 일본에서 잠시 배웠다. 1998년 TV 프로그램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해 연주한 적이 있다. 초보라 내 색소폰을 써야 했는데 미처 준비하지 못해서 방송 관계자들이 급하게 빌려 왔다.

역시 손에 익지 않아 잘 안 됐다. 영화 〈타이타닉〉 주제가를 불었는데 관객들이 멜로디를 제대로 알아 듣지 못했다(웃음). 이후로는 색소폰을 배우지 못했다.

노래는 최근에 거의 하지 않았다. 이제는 여유도 없고.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힘든 일이 많다 보니 노래 듣는 것도 귀찮고.

요즘에는 팝송을 다운받아 듣거나 좋아했던 일본노래를 듣는 정도다. 한국가요는 아는 곡이 없다. 가수들 이름은 아는데 그 노래가 그 노래 같아 곡명을 모르겠다. 이제 아저씨가 다 돼서.

최근에는 어떻게 지냈나.

10월 22일 구단 (방출)발표가 났지만 내가 그 전에 구단에 통보했다. 최동원 2군감독과 면담하면서 “그만 하겠습니다. 몸도 안 좋고 3년 공백이 컸습니다. 극복한다고 제 나름대로 한다고는 했는데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1년 동안 어딘가 비비고 들어가 야구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나서는 것보다는 어린 선수들이 경험을 쌓는 게 좋을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한화에서 느낀 점도 많았고. 최근에는 쉬면서 미래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다.

조성민은 오래 전 야구 이야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진 김재현


한화에서 느낀 점이 많았다고 했다.

한화 2군에 있으면서 선수들이 훈련하는 것을 봤는데 ‘아, 저 선수는 조금만 신경 쓰면 굉장히 잘될 선수인데 기회가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제대로 된 지도를 받지 못해 고생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그러다 방출되는 거 보면 가슴 아프고. 한화는 베테랑들이 많아 자리 하나 차고 들어가기가 힘들다. 기회가 없다.

야구가 그렇다. 1군에 있으면 1군, 2군에 있으면 2군 선수가 된다. 2군 선수들도 그냥 2군에 안주한다. 어떤 선수는 1군에 올라가기 싫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배들 심부름만 하니까.

한화는 중간이 없다. 선수 능력도 차이가 크게 난다. 내가 볼 때는 2군 코칭스태프가 실력도 있고 훌륭한 분들이지만 인력이 달려 세밀하게 선수들을 지도하고 관리하기가 힘든 것 같다.

내가 사라진다고 크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

윤규진이나 김경선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베테랑들이야 그동안 해온 노하우가 있지만 어린 선수들은 자기 것이 없다. 슬럼프가 오면 길고, 좋을 때와 안 좋을 때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른다. 그러다 보면 기복이 심해지는데 이것을 잡아 줄 코치가 부족하다.

제구가 들쭉날쭉한 (윤)규진이는 투구폼을 교정하고 기본기를 가다듬으면 잘할 수 있는 선수다. 좋은 체격이 아닌 (김)경선이는 좋은 공을 던지는데 이것만으로도 타고난 선수다. 경험과 배짱을 키우다 보면 성과가 있을 것이다.

반복된 이야기지만 다른 팀은 몰라도 한화는 이런 선수가 많다. 그러나 프로의식이 결여돼 있는 일부 선수도 있다. 나는 일본에서 2군에 있으면서 많은 선수를 봤다.

그때 열심히 땀을 흘린 선수들은 지금 요미우리 1군에 자리를 잡았다. 스즈키 다카히로는 드래프트에서 꼴찌였는데 현재 요미우리 외야수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스즈키는 발이 아주 빨랐고 매우 열심히 했다. 남들이 잘 때 새벽 1시까지 훈련했다.

황금세대 92학번

어릴 때부터 투수에 매력을 느꼈나.

투수에 끌렸다기 보다는 유치원 때부터 야구와 가깝게 지낸 게 야구를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플라스틱 방망이와 공을 선물하셨는데 발판을 밟으면 공이 공중으로 튀어올라 때릴 수 있게 만든 장난감이었다.

용마초등학교 1학년 때는 야구만 하고 놀았다. 이웃 동네로 경기를 하러 가기도 했는데 그때 고교 선배인 박재용(전 해태)을 만났다. 4학년 때 둔촌초등학교로 전학가 야구부에 들면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했다.

1980년대 야구의 인기는 대단했다. 10명을 뽑는 야구부 모집에 여학생 2명을 포함해 100명이 몰렸다. 당시 체육부장이 키(149cm)가 큰 나를 보고 “꼭 야구부에 오라”고 했다. 내외야를 가리지 않고 뛰다 6학년 때 투수를 맡았다.

투수가 좋았나.

야구는 에이스와 4번 타자 아닌가. 투수도 좋았지만 강한 펑고를 받는 내야수가 싫었다. 신일중에 입학해서 선생님이 어떤 포지션을 봤냐고 얘기하라고 했는데 “외야수와 투수를 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팔꿈치가 아팠다. 친구들과 비치볼로 배구를 했는데 무리하게 팔을 쓰다 뼛조각이 떨어져나갔다. 그때부터 침을 맞았다.

야구 우상은 누구였나.

투수는 박철순(전 OB)과 김시진(현대 감독)이었다. 김시진은 삼진 잡는 능력이 뛰어났다. 타자는 김봉연(전 해태)과 이만수(SK 코치)를 좋아했다.

재활에 도움을 준 최동원 2군 감독은.

난 그 시절 롯데를 좋아하지 않았다. 최감독님이 던지는 폼이 내가 보기에는 웃겼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던질까”하고 궁금해 했다.

1980년대 인기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마동탁과 최감독님이 닮았다. 난 마동탁이 싫었는데 안경을 쓴 최감독님은 완벽한 현실의 마동탁이었다. 한화에서 만났을 때는 이런 이야기를 안 했다(웃음).

신일고 시절의 조성민(왼쪽 큰 사진)과 고려대 시절 조성민(왼쪽 작은 사진)의 앳된 얼굴.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에 진출한 조성민이 2000년 5월 23일 요코하마전 8회에 중간 계투로 등판해 역투하고 있다.
연합포토
신일고 시절 조성민은 최고의 투수였다.

그땐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때가 가장 제구력이 좋았다. 슬라이더는 스트라이크와 볼을 자유자재로 넣을 정도였으니.

투심도 배웠는데 유리한 카운트에서 던지면 무조건 3루땅볼이었다. 직구와 슬라이더, 투심만으로 얼마든지 타자를 상대할 수 있었다. 누구든 내 볼을 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일고 야구부 생활은 어땠나.

타자들이 잘 쳤다. (설)종진(현대 2군매니저)이가 주장을 하고 1번 타자를 맡았다. 선수들이 정말 착했다. 집과 학교, 야구밖에 몰랐다. 팀 연습이 끝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오후 9시까지 불을 켜놓고 자발적으로 운동했다.

다른 학교 선수들은 여학생도 만나고 담배도 피우고 그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우리는 정말 야구밖에 몰랐다.

신일고에는 2년 후배인 김재현(SK)과 조인성(LG)이 있었다.

(조)인성이는 고교 때 손목이 좋지 않았다. 힘은 좋았는데 송구가 약했다. 1991년 3학년 때 장명부(전 삼미) 씨가 인스트럭터로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많이 배웠다. 손목을 세우고 고정해 던져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나더니 그때부터 ‘앉아 쏴’가 됐다.

(김)재현이는 뺀질뺀질했다(웃음). 그러나 재능이 있었다. 3학년 외야수들이 부진할 때 1학년인 재현이가 출전해 다이빙 캐치도 하고 장타도 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990년대 초반 임선동(휘문고), 손경수(경기고)와 고교투수 ‘빅3’로 꼽혔다. 타자로는 광주일고 박재홍이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 (손)경수는 생각도 안 했다. 물론 스카우트들이 경수의 공이 빠르다는 점을 봤겠지만 제구력이 좋지 않았고 그렇다고 경기에서 특출나게 던지지도 않았다. 경기고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전국 고교에 스타가 한 명씩 있었다. 서울에는 신일고에 나와 종진이, 휘문고 임선동, 경기고 손경수, 배명고 김상엽, 중앙고 유진호가 있었다. 지방으로 가면 광주일고 박재홍, 부산고 염종석, 경남상고 곽재성과 차명주, 원주고 안병원, 경북고 최재호, 대구상고 전병호, 춘천고 박태순, 인천고 최원호, 대전고 정민철, 공주고 박찬호와 노장진 등이 있었다.

그때는 찬호보다 장진이가 더 잘 던졌다. 그리고 또 누가 있었더라. 그때는 어느 학교와 붙어도 지금 이야기한 친구들만 잡으면 이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최고의 라이벌은 임선동이었나.

나는 (임)선동이만 생각했다. 선동이는 볼이 빠른 데다 제구력까지 좋았다. 그래서 휘문고와 상대할 때는 선동이 볼에 적응하려고 우리 팀 투수들이 마운드 앞에 나와서 던지는 공을 타자들이 때리는 연습을 했다.

1991년 제21회 봉황기대회 8강전에서 선발 맞대결을 벌인 적이 있는데 우리가 4-1로 이겼다. 나는 그때 선동이에게 1점 홈런을 맞고 승리투수가 됐다.

봉황기대회 결승에서는 선린상고를 12-1로 꺾고 우승했고 황금사자기대회 결승전에서는 재홍이가 있는 광주일고에 14-2로 크게 이겼다. 1991년 봉황기와 황금사자기 2관왕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MVP는 늘 설종진이던데.

당시에는 MVP를 감독이 뽑았다. 박천서 감독이 봉황기가 끝나고 내게 “네가 최우수투수상을 받고 MVP는 종진이를 주자”고 했다. 종진이가 잘하기도 했지만 주장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황금사자기를 우승했는데 또 MVP를 종진이를 주더라. 그땐 내가 패할 뻔했던 8강전 한서고전에서 동점홈런도 쳤고 결승전에서 승리투수도 돼 ‘이젠 나를 주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완전히 삐쳤다. 지금도 그때 우승사진을 보면 얼굴이 삐친 내 사진이 나온다(웃음). 너무 열이 받아 우승 축하연에 참가도 안 하고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

1991년 청소년대표로 미국에 가면서 외국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었다.

미국에서 열렸던 한미일 고교야구선수권대회였는데 나와 (박)찬호, 선동이가 눈에 띈 모양이다. LA 다저스에서 신분 조회가 들어왔고 찬호는 그때부터 미국에서 작업이 들어갔다.

그때 우리는 연고가 있는 집에 민박을 했는데 찬호가 묵었던 집이 스티브 김의 집이었다. 찬호가 그때 아마 미국 진출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

나는 막연히 그냥 야구 잘해서 나중에 해외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대학 3학년 때부터 스카우트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1996년 발행된 박찬호의 자서전 〈Hey, Dude〉에는 박찬호가 조성민에게 전화를 걸어 운동여부를 확인하는데.

난 그것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아 찬호와 사이가 안 좋다. 찬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찬호에게 감정이 좋지 않다. 청소년대표 시절 찬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잘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집에 가자고 해 이틀을 재워준 적이 있다. 대학가서도 찬호에게서 자주 전화가 왔다.

통화내용은 “넌 뭐하냐”(박찬호) “어, 나는 집에서 쉬고 있어. 아픈 데 없냐”(조성민) 등의 대화였다.

나는 정말 친구로서 찬호의 어깨가 아픈 것을 걱정하고 챙기고 그랬는데 나중에 책이 나오고 아는 기자를 통해 알아본 결과 내가 운동 하나 안 하나를 확인하려고 찬호가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찬호가 미국에 가는 것도 신문을 보고 알았다. 찬호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신일고 동기들과 송년회를 했는데 동기인 종진이가 늦게 왔다.

이유를 물었더니 종진이가 “너 몰랐어? 찬호, 미국 들어가잖아” “뭐?” 다음 날 신문을 보니 ‘찬호, LA 입성’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그때 나는 찬호를 친한 친구로 생각했는데 공항간 친구는 종진이와 차명주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찬호한테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잠시 침묵하다)친구한테 배신 당한 느낌이었다.

고려대 시절은 어땠나.

고교 때보다 구속은 빨라졌는데 고교 졸업 이후 허리수술을 받아 제구력과 변화구는 나빠졌다. 허리수술 이후 3주쯤 지나 피칭을 하는데 슬라이더와 투심의 투구감이 사라졌다. 슬라이더 각도 이상했고 투심도 그냥 평범한 직구처럼 날아갔다.

1994년과 1995년 고려대는 2년 연속 대학 3관왕에 올랐다.

내가 1학년 때 (이)상훈(전 LG) 형이 있었는데 우승 복이 없었다. 준우승만 4번 했다. 2학년 때도 우승을 못했는데 3학년 때부터 나와 후배인 (손)민한이가 마운드를 책임지며 우승 횟수가 늘었다. 당시 사령탑이던 조두복 감독이 4학년 때 나를 마무리투수를 시켰는데 목표였던 30승에 2승만을 남겨 놓고 있는 상황이어서 아쉬웠다.

테마곡 애국가

일본행을 결정한 이유는.

처음에는 미국에 가고 싶었다. 메이저리그 토론토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4년 대학 3학년 때는 집으로 스파이크와 티셔츠를 보내주기도 했다.

스카우트와 만나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요미우리 이야기를 했다. 나는 요미우리가 명문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일본야구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께 “무슨 요미우리”냐고 했는데 이미 가계약이 끝난 상황이었다.

거기서 내가 뭐라 하겠나. 아버지는 “일본 갔다가 미국가면 된다”고 설득하셨고 옆에 계신 어머니는 “일본이 가깝고 좋잖아”라고 거드셨다. 당시 찬호가 미국에 갈 때 10억 원을 받고 갔는데 나는 찬호보다 많이 받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했다.

마침 요미우리가 13억 원 선을 이야기했고 “미국에 가면 찬호 다음이지만 일본은 네가 처음”이라는 아버지의 설득에 홀라당 넘어갔다(웃음).

만약 일본이 아닌 메이저리그로 갔다면.

미국에 갔다면 또 달랐을 수도 있겠다. 결과론이지만 부상도 빨리 오지 않았을 것 같다. 일본에 가서 좋아진 것도 물론 있다. 단순히 찬호와 비교한다면 찬호는 1994년에 공이 빨랐지만 일본에서 찬호 정도였으면 경기에 못 나갔다.

내가 활동했던 1990년대 중반 요미우리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은 볼넷을 아주 싫어했다. 투수들이 볼을 던지면 더그아웃에 있는 감독 눈치를 볼 정도였으니까. 찬호였다면 교체됐을 것이다.

내가 볼 때 찬호는 토미 라소다 감독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점수를 주든 볼넷이 나오든 경험을 쌓게 해준 게 오늘의 찬호를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미국 갔으면 또 모른다. 미국은 투구수를 관리해 주니까. 나는 일본에서 한 경기에 많으면 130개 이상, 조금 던져도 110개를 던졌다. 1998년에도 한 경기를 빼고는 이긴 경기에서는 거의 완투했다.

1995년 요미우리와 계약한 뒤 1년 반 동안 2군 생활을 했다.

2군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관계자들이 하는 말이 “어떻게 이런 몸을 갖고 야구를 했는지 불가사의하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의미로 들렸다. 첫 번째는 “이 몸으로 볼을 던진 게 놀랍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게 무슨 몸이냐”는 것이었다.

요즘도 해외에 진출하는 선수들에게 이야기하지만 요미우리 선수들은 몸이 안 된 상태에서도 피칭을 세게 하는 경우가 있다. 요미우리 연습장의 포토 라인에서는 사진기자들이 투수가 공을 들기만 해도 찰칵찰칵 사진을 찍는다.

그때 감독이 뒤에서 보고 있으면 선수는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나도 몸은 안 됐지만 힘차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해서 던지니까 몸이 좋지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데뷔 초기에 2군에 있었던 게 내게는 득이 됐다.

어려움은 없었나.

알고 보니 요미우리에는 라인이 있었다. 나를 반대한 라인은 선동열 선배를 주니치에 빼앗기고 문책 당한 뒤 새롭게 들어선 라인이었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눈엣가시였겠나.

나중에 그 라인이 2군 코치까지 내려왔다. 그래서 내가 2군에서 열심히 공을 던졌는데도 1군에 “조성민은 형편 없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 이것 때문에 내 통역원이 많이 싸우기도 했다.

1997년 후반기 마무리로 뛰었다.

1997년 2군에서 19이닝 동안 무실점하고 있는데 1군 마무리 쪽에 기회가 생겨 올라갔다. 7월 초 삿포로 순회경기인 주니치전에서 2-1로 앞선 9회 등판해 선동열 선배가 지켜보는 가운데 첫 세이브를 올렸다.

후반기 막판에는 요코하마의 사사키 가즈히로, 주니치의 선동열, 요미우리의 조성민이 마무리 빅3로 꼽혔다.

1998년 전반기에만 7승을 올리며 주목을 받았다. 당시 피칭스타일은.

마무리투수일 때는 시속 153km까지 나왔다. 선발로 뛰던 1998년에는 시속 146~147km의 공을 던졌는데 중계를 보면 공 끝이 워낙 좋아서 공이 살아 들어오는 것 같았다.

포수가 직구 사인을 낼 때는 안쪽 바깥쪽 없이 그냥 직구였다. 타자들이 치면 파울 아니면 헛스윙이었으니. 카운트를 잡기도 쉬웠다. 유인구로 포크볼을 던지면 방망이가 그냥 따라 나왔고 직구를 던지면 내야플라이였다.

야구를 참 즐겁고 재미있게 했다. 나는 테마곡으로 애국가를 골랐다. 도쿄돔에 “피처, 조성민”이라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 애국가가 울려 퍼지게 하고 싶었다.

2005년 한화와 계약한 조성민은 재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만족스러운 투구를 보이지 못했다.
사진 제공=한화 이글스
타격에도 소질이 많았다. 일본통산 타율이 3할4푼1리(44타수 15안타)다.

1998년 5월까지 타율이 7할이었으니까. 투수는 완투해도 많아야 2번이나 3번 타석에 들어선다. 5타수 5안타까지 쳤다. 한번은 야쿠르트전에서 상대 투수가 8번 타자를 피하고 9번 타자인 나와 맞섰다.

그때 ‘너희들이 나를 우습게 봐’라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전 타석에서 삼진을 두 차례 당했는데 모두 슬라이더가 승부구였다. 또 슬라이더를 던질 거 같아 기다리고 있다 중전안타를 쳤다.

그때 포수가 일본프로야구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후루타 아스야여서 기분이 좋았다. 야쿠르트전에서는 타석에서 포수의 움직임을 힐끗 보곤 했다. 코스를 예측하려고 그랬는데 그럴 때면 후루타가 “어이, 성민이 그만 좀 보지”라고 말했다.

그해 히로시마전에서 요미우리가 대승할 때 타석에 들어서려 하니 나가시마 감독이 “그냥 삼진 먹고 나오라”고 했다. 난 그때 방망이를 잡으면 미친 듯이 치고 싶었다.

그래서 안타를 치고 출루했는데 공교롭게 우리 팀 1번 타자가 빈볼을 맞았다. 공수가 교대되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쓸데없이 안타를 쳐 동료가 맞았다”는 것이었다.

일본 해설가들도 그때 조성민은 투수이면서도 공격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 만약 내가 5년만 젊어 한화에 입단한다면 타자로 전향하고 싶다.

한화에서도 더그아웃에서 타자들을 보면 “왜 저 볼을 못 치나”하고 답답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조언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잘 치는 타자도 있었다.

당신의 공을 가장 잘 공략했던 타자는.

야쿠르트의 내야수 도바시 가쓰유키다. 방망이를 짧게 잡고 볼카운트가 불리하면 쳐내는 스타일이라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외국인선수들은 크게 휘두르기 때문에 포크볼을 던지면 대부분 삼진이었는데 도바시는 그렇지 않았다.

정민철은 SPORTS2.0과의 인터뷰에서 요미우리만의 이상한 차별이 있다고 했다.

요미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에도 있다. 한국이 더 심하다. 요미우리는 선수끼리는 그런 게 없다. 이런 말 하면 뭐하지만 한국은 선수끼리 따돌린다.

정민철, 정민태와 같은 팀에서 경쟁 했는데.

처음에는 (정)민철이가 요미우리에 오는 게 싫었다. 같은 나라 선수끼리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좋지 않다. 민철이가 올라가면 내가 내려가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민철이가 (정)민태 형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민태형이 올 때 싫었던 건 인터뷰 내용 때문이었다. 자신만 생각하고 프로 세계는 냉정하다는 식의 내용이었는데 그런 선후배 관계가 어디 있나.

한국인 투수 3명이 싸우면 희생되는 것은 결국 한국인이다. (이)병규(주니치)와 (이)승엽이가 같은 팀에 있다고 생각해 보라. 민철이와는 잘 지냈다.

다치기 쉬운 투구폼이라는 말이 있었다.

나는 하체를 많이 쓰는 투구폼이 아니다. 밸런스를 잡아도 상체만 잡지 하체는 잡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상체만 맞추면 잘 던졌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하체를 안 잡고 상체로만 던지려고 하니 공의 스피드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중요하게 느낀 게 하체였다.

일본에서 던질 때는 하체가 좋아서 상체만 쓰면 됐는데 한국에서는 상체만으로는 안 됐다. 나는 팔꿈치를 유난히 많이 쓰는 편이었다.

요즘 이승엽의 활약을 보면 어떤가.

옛날 생각 난다. 한창 잘할 때니까 좋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잘하면 엄청 띄운다. 아마 승엽이도 부진할 때 느꼈을 것이다. 병규도 잘하니까 좋다.

1998년 7월 올스타전에서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시즌을 마감했다.

결국 마지막 불꽃이 됐다. 사실 올스타전 전부터 팔꿈치가 좋지 않았다. 투수가 갑자기 좋아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갑자기 좋아진 공을 던지면 끝나는 거다. 좋아졌던 것은 다치려고 그랬던 거다.

갑자기 공 스피드가 나오는 듯하지만 다음 날 어깨가 나간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안 던지고 관리했으면 그 시즌은 마무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외국에 있다 보니 매스컴이 선수를 망치는 경우가 많다. 유명인도 매스컴이 만들지 않나. 조금 더 여유 있게 재활했다면 롱런할 수 있었는데 한국 언론은 ‘조성민,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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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00 2008/10/07 13:35

    아깝다
    훌륭한 야구선수였는데...

    perm. |  mod/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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